어린 시절, 병약했던 나는 걸핏하면 학교도 못 가고 앓아누웠습니다. 방 아랫목 이불 속에서 내 작은 몸뚱이를 할퀴며 달려드는 신열에 시달리기 일쑤였습니다. 어쩌다 눈을 뜨면 창호지 문구멍으로 들어온 햇살이 베갯머리에 아른거렸지요. 그 햇살 가닥을 잡고 환한 바깥세상으로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마당을 쓸고 가는 바람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어디로든 가고 싶었습니다. 환청이듯, 아득히 먼 산에서 날아오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적막한 세상의 외진 구석에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훌쩍거리다 잠들었습니다.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아들 걱정에 들일에서 일찍 조퇴하고 돌아오신 것이었지요. 들일로 굳은살이 박인 어머니의 거친 손에서 보리밭 푸른 냄새가 났습니다. 들판의 바람소리 물소리가 묻어났습니다. "원기소라도 한 통 사먹였으면 이렇게 병약하지는 않을 낀데…." 내가 아파 누울 때마다 늘 중얼거리시던 말씀이었지요. "조금만 기둘려라. 내 금방 흰죽 끼리 오께." 부엌으로 가시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놓으며 나는 또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곤 했습니다.
내가 앓아누울 때마다 어머니는 흰죽을 끓이셨습니다. 쌀을 빡빡 문질러 씻을 때는 차르락차르락 새 우는 소리가 났었지요. 새들이 작은 부리로 뱉어놓은 낱말들처럼 뽀얀 쌀알을 다시 한 번 깨끗한 물에 헹구어 솥 바닥에 깔아 앉힌 다음 뜨물을 정성스레 붓고 마른 삭정이 불을 아궁이에 지폈었지요. 아궁이 속의 환한 삭정이 불꽃이 솥 안으로 스며들고, 솥 안의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면서 쌀 알갱이 속에서 흘러나온 흰 속살들이 하얗게 물에 퍼져 깨끗한 죽물로 엉겼습니다. 어머니가 떠먹여 주시던 흰죽. 그 흰죽을 한 숟갈씩 받아먹으면 바짝 말랐던 입안에 침이 돌았습니다. 잃어버렸던 허기를 되찾으며 일어나 앉았습니다. 간절함으로 끓여낸 어머니의 흰죽은 늘 잦은 병치레의 수렁에서 나를 건져냈습니다.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렇게 참담하고, 그렇게 황망하고, 그렇게 비통하고, 그렇게 끔찍하고, 그렇게 죄스럽고, 그렇게 부끄러울 일이 어디 또 있을까요. 그날 바다가 서서히 배를 집어삼키는 안타까운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살아 있어도 옳게 살아 있지 않으면 그것 또한 헛된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흰죽이 생각났습니다. 그 시퍼런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생명들을 건져내어 따스한 흰죽을 떠먹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금방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살아가는 일의 정도(正道)와 원칙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벗어난 거리가 멀면 멀수록 가짜가 더욱 진짜스럽게 판을 치겠지요.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제도나 기구나 시스템은 가짜입니다. 정치가의 연설도, 교육자의 가르침도, 지식인들의 주장도 생명존중의 진정성이 없다면 모두 모두 가짜이지요. 살펴보면 구석구석 수상한 것뿐입니다.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불안의 안개만 짙게 깔립니다.
분노와 좌절과 비난과 삿대질이 들끓습니다. 이 답답하고 비통한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서, 남을 쳐다볼 게 아니라 우선 나 자신의 삶부터 깊이깊이 성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쯤, '흰죽 먹는 날'을 정해 실천해 보려고 합니다. 이날이 되면 우선 압력 밥솥을 치우고 작은 쇠솥을 꺼내 걸려고 합니다. 소독약 냄새 나는 수돗물 대신 깊은 산 속 옹달샘 물을 길어오겠습니다. 가스불을 치우고 삭정이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쌀이 아니라 맑은 햇살과 바람이 빚은 생명의 쌀을 정갈하게 씻어, 그 옛날 어머니가 하셨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흰죽을 끓이겠습니다. 하루 세 끼 흰죽으로 끼니를 이으며 스스로 허기져 하늘을 바라보겠습니다. 채신머리 없이 고개를 드는 식욕을 꾸짖으며 한없이 가난해지겠습니다. 살아 있음의 깊은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흰죽을 먹으며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겠습니다. '너는 지금 잘 살고 있느냐?'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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