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잃어버린 믿음

2007년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영화가 개봉하면서 유행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을 뜻한다. 영화는 유쾌하면서도 애잔하게 마무리되지만, 이 낱말의 어원은 좀 끔찍하다. 목매 자살할 때 받침대로 사용한 양동이를 차버린다는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에서 유래해, 요즘은 죽다는 뜻의 속어로 쓰인다. 영화의 세계적인 흥행 성공과 함께 국내에서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버킷 리스트 만들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내가 죽기 전에'(Before I Die)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시작은 캔디 창이라는 공간 아티스트가 2011년 2월 미국 뉴 올리언즈에서 자신이 살던 이웃 폐가 벽에 분필로 '내가 죽기 전에, 나는 ~을 하고 싶다'(Before I Die, I Want To~)는 글을 쓰면서부터다. 당시 창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크게 상심한 상태였다. 하루 만에 이 벽면은 이웃의 글로 가득 찼고, 지금은 전 세계 65개국에 30개국 언어로 쓰인 475개의 '내가 죽기 전에' 벽이 있다. 물론, 죽음을 맞는다는 가정이 전제이어서 여러 걸림돌 때문에 당장은 못하지만, 버킷 리스트와 비슷하게 '다시 사랑에 빠지기' '가장 친한 친구와 여행' 등 하고 싶은 일을 많이 적었다.

세월호 참사로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분노와 사람에 대한 증오만 쌓인다. 허망하고 급작스런 죽음 앞에서 유가족뿐 아니라 많은 국민이 우울증과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아직 수십 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는 상황인데다, 여러 대형 참사 결과에서도 나타났듯 유가족의 상실감과 공허함은 그 끝이 없다.

이번 참사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통절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믿음'이라는 낱말을 잃었다. 이는 최근의 16~19세 청소년 여론 조사에서 잘 드러난다. 또다시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부가 신속하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9%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정부의 대책은 82%가 부실하다고 답했고, 43%는 이민을 가고 싶다고 했다. 대형 참사가 끊이지 않는 불신의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버킷 리스트 만들기나 '내가 죽기 전에' 벽에 쓸 것도 없이 그동안 미뤄둔 '하고 싶은 일'을 당장 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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