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동안 이별과 실패는 누구나 마주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아픔이자 슬픔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한 아픔과 고통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치유될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전 국민이 세월호 비보에 가슴 아파하며 열흘째 눈물과 기도로 집단 우울증에 빠져 있던 날 오후, 남편의 죽마고우였던 쉰을 갓 넘긴 그가 꽃 같은 아내와 자신을 쏙 빼닮은 새내기 초등학생 딸, 유치원생 아들을 남겨둔 채 힘겨운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눈이 어찌 쉽게 감겼겠는가. 우리는 2주 전 지인들과 함께 그가 투병 중인 병실을 찾았다. 병색이 짙어진 그는 말 한마디 몰아내기도 힘겨운 상황이었고 초췌한 모습의 그의 아내는 두 눈이 빨개진 채 그의 곁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우리는 그의 손과 어깨를 붙잡고 애써 눈물을 삼키며 "너는 이길 수 있다. 마음 편히 먹어라. 또 보자"는 말만 되풀이하다 병실을 나섰다. 나는 그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들이 이 병마와 싸워 이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의 아내에게 힘들고 혼자 해결하기 곤란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달라는 당부의 말도 남겼다.
지금은 대학생이 돼 군 복무 중인 아들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결혼 전까지 우리 가족의 나들이에도 자주 동행했던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바로 그였기에 함께한 세월의 깊이만큼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사람 좋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우락부락한 외모 탓인지 결혼이 우리보다 많이 늦어져 주변에선 걱정과 안타까움이 컸다. 그런 그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결혼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을 때 우리 부부는 누구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축복의 인사를 건넸다. 그의 아내는 나와 띠동갑쯤 되는 조선족의 예쁘고 지혜로운 아가씨였고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인연을 맺은 나를 언니라며 따랐다. 내가 자신의 아내에게 우리말을 잘 가르쳐 줄 사람이라 여겨서인지 그는 늘 자신의 아내와 내가 친하게 지내길 바랐다. 나도 그들 부부를 지켜보는 것이 흐뭇하고 좋았다. 남편은 수필로 그들의 만남을 축복하지 않았던가. 결혼 후 건강한 딸과 아들이 태어났고 성실하고 재미나게 사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우리가 가졌던 터무니없는 걱정과 우려는 옅어지고 지워졌다.
그런 그가 몇 년 전부터 암 투병을 시작했고 이겨낸 듯 보이더니 올봄 재발이 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워낙 건강한 그였기에 쉽게 떨치고 일어날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내와 자식이 곁에 있는데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철석처럼 단단한 믿음이었다. 나 역시 자식을 키우는 어미라 그런지 아픈 그도 염려스러웠지만 병수발과 육아, 시집살이를 병행할 그의 아내가 늘 안쓰럽고 어린 자식들로 인해 더 가슴이 미어졌다.
작년 3월 나는 황망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이별을 겪었다. 딸 가까이 이사를 두 달 앞둔 어느 날, 이사 날짜를 손 없는 날로 정하고 가구를 어떻게 배치하고 새로 구입할 것이 무엇인지를 도란도란 의논했던 그 봄날에 간다 온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친정 엄마와의 이별은 지금껏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한다.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슬픔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반응하게 된 것이다. 혼자서도 상가에서 조문하던 내가 그날 이후 더는 혼자 장례식장을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수십 번 마음을 다잡고 감정을 추슬러야 간단한 조문의 절차를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경련을 일으킨 듯 덜덜 떨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인이 된 그의 영면을 기원하며 남겨진 그녀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주기 위해 나는 용기를 내어 달려가야만 했다. 그녀에게로. 손잡고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녀가 슬픔을 덜고 살아갈 힘을 얻길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는 그를 정말로 좋아했기에 앞으로도 그가 사랑했던 가족을 옆에서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고 각박해진다 하더라도 처음 먹은 마음대로 이들을 평생 육친의 정으로 보듬어 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팽목항에서는 실종자들의 가족이 하염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다.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미안하고 죄스러운 얘기,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내 아이도 갈 예정이었던 그 여행길에 모든 가족과 어른의 이름으로, 부모의 이름으로 분노하고 가슴 찢어지는 4월. 본인의 고통이 친구들에게 짐이 될까 걱정해 연락조차 하지 말라고 했다던 그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위로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김태연(대구 중구 달성공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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