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저 최저층에 있는 본성에 해당되는 것을 꺼내서 만질 수 있는 감각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고 싶었다. 쉽지는 않은데 본질적인 비밀이랄까. 그것을 형상화해 내겠다는 생각에서 이 소설을 썼다."
박범신(67)이 소설 을 통해 '불온한' 감성의 청년작가로 되돌아왔다.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한 여자', 결국은 한 남자와 두 여자 간의 '스리섬'이라는 다소 불편해 보이는 소재를 통해 그는 일대일의 사랑이라는 관계로는 완성할 수 없는 사랑의 본질을 밑바닥에서부터 파헤쳤다.
"사랑이라는 말이 가진 폭력성을 나는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갖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천연스럽게 상대편을 장난감처럼 자주 취급하면서, 그것에 대한 아무런 깊은 성찰도 갖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부서지지 않는 장난감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러므로 사랑은, 두려워요. 모든 사랑에는 그런 위험이 다 깃들어 있어요. 훼손하기 위해 욕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도 많아요…."
그는 에 대해 "(남녀 사이의) 일대일의 관계는 다 깨져서 없는 것 같다. 사회정치적인 행위로서 결혼제도가 남아있지만 정신 속에서 완전한 소유 개념으로서의 사랑의 욕망은 이미 실종된 것 아닌가. 제도로서 일부일처제도가 남아있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다. 젊을 때는 나도 사랑이란 고요하지 않으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며 '양다리'는 사랑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제 사랑도 다자관계로 접어든 것 같다. 누군가 사랑의 완성을 꿈꾸거나 이 소설의 논리를 따른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다. 우리 DNA 속에 깃들어 있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본질을 까발리는 것이 내 목표였다"고 말한다.
그의 목표는 일견 성공한 것 같다. 죽음과 사랑을 주제로 한, 한 남자와 두 여자가 한 덩어리가 되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소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있지만 그는 교묘하게 이 소설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같은 소재는 일흔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 '노작가'가 다루기에는 더더욱 불편한데도 말이다.
"생물학적 나이는 그렇지만 내 감수성은 내공이 안 쌓이는 것 같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심지를 찾아가고자 하는 욕망, 불온한 그것은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은 그의 전작 와도 가까워 보였다.
"한 평론가가 쓴 것처럼 와 가장 가깝기도 하고 가장 멀기도 하다. 는 남녀의 욕망보다는 늙어가는 슬픔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것은 젊음 자체에 대한 탐욕,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욕망이 없다. 세 사람이지만 삼각관계로서의 욕망도 없고 소유하겠다는 욕망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표현하기가 어렵고 불가능한 사랑이다. 그러나 의 문체와 닮았고 인간의 본원적인 문제에 닿아있다는 점. 인간의 본질을 육체라는 코드를 통해 표현하려는 점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인의 욕망과 이들의 욕망은 차원이 다르다. 이들의 욕망은 그런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사랑에 대한 그것이다. 그래서 은 와 멀게 느껴진다."
금기시된 사랑은 그가 혹은 우리 모두가 꿈꾼 적이 있는 사랑의 원형인지도 모른다.
"늘 꿈꾸지만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앉았다가 일어서면 깨지는 유리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완전한 사랑의 욕망은 한순간 오르가슴을 경험하겠지만 끝나고 돌아서면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것 아닐까. 이 소설은 완전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해도 잘 안 되는 나의 딜레마 같은 고백이다."
박범신은 그래서 위험하고 불온한 청년작가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한다.
"현실에서는 물리적인 나이에 맞게 행동하지만 내 감성은 지금보다 더 불온하게 유지하고 긴장시키고 싶다. 그것이 작가로서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다."
그는 종종 트윗을 날리면서 '힐링'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힐링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참사가 수습되지 않았고 '분노'가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노의 발언을 삼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슬픔만 말하기에는 제 감정이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아직 슬픔을 생각할 때도 아닌 것 같다. 어떤 말도 하기가 어렵다. 우리 모두가 공범이고 종범이고 방관자였는지 모르지만 국가가 대응하는 것을 보고 너무 절망적이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 무엇으로 힐링하겠나. 눈물로 극복되는 슬픔이 있고 눈물만으로는 극복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 지금 우리들의 슬픔은 울어서 극복될 슬픔이 아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가 오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분노가 몸속의 가시처럼 우리를 찌를지 모르지만 오래 가지고 가야 한다. 그것은 특정 정파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온 국민이 자본의 노예로서 거대한 카르텔이 된 이 사회,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키우고 사랑하고 살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힐링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른다."
-소소한 풍경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자. 그 나이의 작가가 쓴 것 같지 않게 감성적이다.
"나이는 일흔에 가깝지만 내 별명이 '청년작가'다. 감수성은 내공이 쌓이지 않는 것 같다. 저는 점점 더 감수성이 예민해져 가고 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젊은 작가가 썼다면 다른 느낌이 날 수도 있다. 나이 든 작가의 필터가 있다. 이 나이에는 이런 소설을 쓰지 않고 존경받는 소설을 써야 하는데….(웃음) 일상은 내 나이에 합당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내 영혼은 계속해서 불온하고 일상의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청년다운 감수성은 짐승 같은 것이다. 내 속에 나이를 먹지 않는 짐승이 하나 들어앉아 있다. 나는 그 짐승이 하고 싶은 말을 받아쓴 것일 뿐이다."
-소설 주인공의 배경이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 집안과 탈북자 등 무겁다.
"그들이 20, 30대이면서도 생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로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죽음을 많이 겪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오히려 오염되지 않은 상태의 인간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의 사회적 백그라운드인 광주와 탈북자 문제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우리 사회는 자본을 받들어 모시는 구조, 즉 오로지 자본에 복무해야 하는 강력하고도 폭력적 구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런 폭력적 구조에 의해 우리들의 본원적인 사랑이 끊임없이 훼손당하고 있다. 그런 메시지 때문에 주인공들에게 그런 사회적 환경을 만든 것이다."
-은 가볍거나 소소하지 않다.
"소설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끔찍한 비극도 겪고 그들이 꿈꾸는 영원한 덩어리가 되기 위한 꿈에 비하면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는 소소한 것이다. 그것을 소소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겪으면서 '나쁜 놈'이 되지 않고 순수한 덩어리로서의 자기 본질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죽을 것 같은 고통도 불멸의 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소한 것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되돌아보니까 옛날에는 목숨을 걸었던 일들이 다 소소하다."
-작가들도 요즘에는 사회에 초연할 수 없다.
"이문열이나 황석영처럼 한 진영을 대표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에서 원용되듯이, 안티 세력을 건들면서 작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전략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거기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케이스다. 나는 예술가적인 작가로 시종하려는 마음이 강하다. 사회적 발언은 한다. 그러나 문학이 어떤 정파에 매몰돼서는 안된다. 물론 소설은 한국사회에서 좌파적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소설은 가난하고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들 편이 될 수밖에 없는 문학이다. 나의 사회적 발언은 나 등에서 거의 다 한 것 같다. 그때는 우리 문학이 현실에 대해 너무 비판을 하지 않아서 속상해서 쓴 것인데 앞으로는 생의 비밀스러운 본질을 따라가고 싶다. 나에게는 아직도 고등학교 때의 순수한 문예반 시절의 순정주의가 더 강한 것 같다."
-분노가 당장 사라지지 않더라도 힐링이 필요한 시대다.
"세월호 사태를 보면서 여기서 어떻게 시를 쓸 수 있겠는가. 마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보고 어떤 시인이 '서정시는 끝났다'고 했듯이.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국가가 있는가. 철저하게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한강의 기적을 만든 불의 전략으로는 안 된다. 개발연대시대에는 온 국민을 자본의 맹목적 노예로 만들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정체성의 회복밖에는 방법이 없다. 대통령 자신이 '대박'이라는 말을 쓸 때 나는 불안했다. 내가 대박이면 다른 사람은 찬스가 없다. 온 국민의 DNA 속에 대박이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정말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불의 전략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물의 전략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본이 우리를 갖고 놀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에 맞서서 개인이 갖고 있는 삶의 정체성을 회복할 때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힐링이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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