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바라던 독립 뒤 분단, 납북돼 삶 마친 김규식

"우리의 독립은 평화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고로 금일 우리 민족은 그 멸취(滅取)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오."

아버지의 귀양 충격으로 어머니가 죽자 4세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집에 입양돼 서양교육을 받기 시작한 김규식(金奎植'1881~1950)은 독립신문 입사, 독립협회 가입 등으로 일찍 세상에 눈을 떴다. 1897년 미국 로녹대학에 유학했는데 불어'독어 등 외국어 실력은 발군이었다. 1903년 졸업뒤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04년 귀국, 선교와 교육, 민중계몽운동에 전력하다 1913년 상해로 가 독립운동을 하며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발표,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1919년 오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그 뒤 1922년 소련에서의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 레닌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 미국에서의 독립자금 모금, 민족혁명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김구 주석과 함께 부주석으로 임정을 이끌다 광복 후 귀국, 김구와 민족분단을 막으려 남북협상을 벌였다. 1950년 전쟁 때 납북돼 12월 삶을 마쳤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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