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백화점, 대형마트, 쇼핑몰 등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기 때문에 화재 등 각종 사건, 사고에 대비한 철저한 관리가 요구되는 곳이다. 건물주의 부실한 관리와 허술한 대처가 맞물리면 대형 인명 피해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소방당국 등도 이 점을 잘 안다. 그래서 갈수록 소방안전 시설이나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점들이 보인다. 매일신문은 10일 문화체육관광부'소방방재청 주최로 대구의 한 영화관에서 실시된 '극장 화재 시 비상대피 모의훈련'을 지켜보고, 곽동순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와 대구의 영화관들을 둘러보며 안전 상황을 따져봤다.
◆모의훈련서 드러난 허점
세월호 침몰 참사 등으로 어느 때보다 안전이 강조되고 있다. 10일에는 문화부와 소방방재청이 이례적으로 전국 20개 영화관에서 동시에 재난 대피 훈련을 했다. 대구의 한 영화관에서도 이 훈련이 실시됐다. 상영관 입구 부근에서 불이 났다는 가정 아래 이뤄진 이날 훈련에 현미경을 들이대 봤다.
낮 12시 10분. 화재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며 영화관에 불이 났다는 것을 알렸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갑자기 스크린이 꺼졌다. 30여 명의 관객은 주변 상황을 주시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경보음에 영화관 직원은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과 위치를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 영화관 대기석에 서 있던 검표 직원 3명이 빨간 불빛이 깜빡이는 경광봉을 들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안전하게 대피해 주십시오." 직원은 코와 입을 막고 자세를 낮춘 채 자신을 따라오라며 관객들에게 소리쳤다.
상영관 입구 쪽에서 불이 나 직원은 스크린이 있는 앞쪽 출구로 달려가 문을 열고 경광봉을 흔들었다. 깜깜해진 상영관에서 경광봉은 관객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불빛이 됐다. 위급한 상황과 보이지 않는 공포에 떤 관객은 계단을 헛디디기도 했지만 직원들이 침착하게 관객의 대피를 도왔다. 마지막 관객이 빠져나가자 앞장선 직원이 비상계단으로 관객을 인솔했다. 관객은 무사히 옥상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상황을 살피며 구조를 기다렸다. 영화관에 관객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직원들도 관객의 뒤를 따랐다. 화재 발생 5분 만에 관객과 직원 등 영화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옥상으로 탈출했다.
이날 모의훈련의 결과만 본다면 인명 피해 '제로'(zero). 그 배경엔 영화관 직원들의 신속한 대응, 침착했던 관객의 행동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훈련이라는 것을 사전에 인지한 상황에서 이뤄진 훈련임에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몇 가지 지적 요소가 눈에 띄었다.
비상상황 시 직원들은 지정된 장소에 비치된 휴대용 비상조명등 대신 경광봉만으로 관객의 대피를 유도했다. 이는 직원들이 평소 비상조명등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경광등은 분명히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바로 옆을 분간할 수 없다 보니 발을 헛디디거나 부딪히는 관객도 있었다. 만약 누군가 넘어졌다면 어떤 상황이 빚어졌을까.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어둠 속에서는 직선으로 빛을 비추는 비상조명등을 사용하도록 비치하고 있다.
직원들은 더 적극적이어야 했다. 긴급상황 발생 때 직원들의 행동은 관객의 생명과 직결된다. 누구보다 구조를 잘 알아 효율적인 탈출을 유도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훈련에 임하는 직원들의 자세는 소극적이었다. 특히 고함이 작아 실제상황에서 누군가가 "이쪽이다"며 큰소리를 쳤을 때 관객은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무작정 따라가 버릴지도 모른다.
한 소방관은 "비상 상황 시 직원들은 침착하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로 볼륨을 높여야 관객이 믿음을 갖고 그의 지시와 안내를 따르게 된다"고 했다.
◆곳곳에 노출된 안전불감증
곽동순 교수와 함께 둘러본 대구의 몇몇 영화관. 여전히 대형 인명 피해를 자초할 수 있는 몸에 밴 '안전 불감증'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관객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비상계단은 '생명로(路)'의 기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복도엔 각종 물건이 쌓여 있었고, 돌출된 벽면은 비상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의 이동에 장애가 될 것으로 지적됐다.
대구 중구의 A영화관 복도엔 테이블과 쓰레기통, 팸플릿 거치대 등이 놓여 있었다. B영화관은 복도 벽면에 약 5m 간격으로 사각기둥이 돌출돼 있었다.
곽 교수는 "밖을 볼 수 없는, 유리창이 없는 영화관은 화재로 정전이 되면 암흑천지가 된다. 이때 복도에 쌓인 적치물은 탈출을 가로막는 마수(魔手)이다. 이를 대비해 평소 비상로 확보 및 관리와 함께 야광스티커 부착, 점등식 피난유도선 설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잠시 편하고자 안전을 내팽개친 현장도 목격됐다. A영화관은 방화셔터가 내려오는 곳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방화셔터가 내려오는 것을 방해했다. 바닥에 '방화셔터 내려오는 곳'이라는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었지만 무시됐다. 또 안내 스티커도 훼손이 심했다.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커지는 긴급상황에서 눈에 띌 리 없었다.
B영화관은 상영관 측면 복도가 계단식으로 이뤄진 점이 위험 요소로 꼽혔다. 곽 교수는 "비상시 관객은 급한 마음에 뛰게 된다. 이때 복도로 이어지는 통로가 계단으로 돼 있으면 헛디뎌 넘어질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엉키게 된다면 탈출을 지연시키고 압사 등의 2차 피해도 동반된다. 대혼란은 대형 사고로 직결된다"고 했다.
매뉴얼도 손볼 게 한두 곳이 아니다. 비상상황에 대처하는 직원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화재 등에서 관객의 생명줄이 될 수 있는 것은 직원들의 안내다. 특히 영화관처럼 동시에 수백 명이 이동해야 하는 곳에서는 관객을 질서정연하게 유도하는 직원들의 강한 통솔력이 필요하다. 잠깐의 혼란으로도 좁은 통로는 '병목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 그 결과는 엄청난 피해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대부분 영화관의 매뉴얼에는 '손님에게 비상구를 안내하고 차례로 내보낸다' 등의 기본 요령만 기재돼 있다.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업종 특성상 정규직원보다는 아르바이트생 등 일시적인 인력이 많아 교육은 지속성이 없다. 올해 초 대구의 한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김모(23) 씨는 "보통 한 달에 한 차례 안전교육을 하지만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교육은 구두로 이뤄졌고 아르바이트생에게는 비상구 위치를 파악하는 수준으로 교육이 마무리됐다"고 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비상시 대피로를 관객에게 알려주지만 실효성은 의문투성이다. 영상이 광고 중 나오며 말이 빠르다. 설명 자막은 노출 시간이 짧은데다 추상적이다. 비상대피 안내 도면도 명확지 않다. B영화관의 경우 안내도를 캄캄한 상영관 내부에 붙여놓은데다 검은색 바탕이라 대피로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곽 교수는 "직원이 상영관에서 영상이 나올 때 비상구 방향을 손으로 가리켜 설명하는 등 위험상황에 대비한 인지력을 높이는 식의 개선이 필요하다. 비상대피 영상을 도면에 화살표로 안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영화관답게 영상물 등으로 알려준다면 관객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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