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참 좋은 것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정목일 수필가가 금아 피천득 선생님에 관해 쓴 글을 읽었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가장 먼 지방에 살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필에 매달려 있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반신반의하며 한숨을 쉬던 중이었다고 한다.

'현대문학'으로 추천된 작가들이 모여 동인지를 낸 자리에서 금아 선생님이 격려사를 하실 때 그는 그만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고 한다. 단상에 오른 금아 선생님이, "이런 자리에 잘 나오지 않지만 죽기 전에 정목일 수필가를 한번 만나보려고 왔습니다. 제 저서에 서명도 해 가지고 왔습니다."

나 역시 그 글을 읽었을 때 벅찬 감동을 느꼈다. 기쁨으로 소년처럼 발그레해지는 그의 얼굴이 연상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이렇게 좋은 일을 만날 수 있을까. 감히 견주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호흡이 딱 멈추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다. 청마 유치환 선생님이 우리 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오셨다. 전임지였던 부산에서 학생들이 못 가시도록 울며불며 붙잡는 통에 이틀이나 늦게 도착하셨다. 베레모를 쓰고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오셨다. 480명의 여고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선생님이 훈시하실 때 우리는 모두 숨을 죽였다.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상에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훈시가 되었다. 선생님이 운동장을 서성일 때 우리는 몰래 훔쳐보았다.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 또한 선생님의 일부였을 따름이니까.

문예반장이었던 나는 경주에서 열린 신라문화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같은 학년의 한 친구는 '화랑과 원화' 선발대회에서 '원화 진'으로 뽑혔다. 대구시장이 우리 둘을 불러다 치하를 해 주시고, 청마 선생님도 기뻐하시며 자장면을 사 주셨다.

'원화 진'은 우아하게, 깨끗하게 먹었다. 나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손으로 입 가장자리를 닦아 주셨다. 근사하게,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는 순간 호흡이 딱 멎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자장면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젓가락질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스승이 있다는 건 최고의 행운이다. 말 한마디, 손끝 하나로 심장을 멎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최신 기사

mWiz
18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조국 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비상계엄 사과를 촉구하며, 전날의 탄핵안 통과를 기념해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극우 본당을 떠나...
정부가 내년부터 공공기관 2차 이전 작업을 본격 착수하여 2027년부터 임시청사 등을 활용한 선도기관 이전을 진행할 계획이다. 국토교통부는 2차...
대장동 항소포기 결정에 반발한 정유미 검사장이 인사 강등에 대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가운데, 경남의 한 시의원이 민주화운동단체를...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