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오지 기행 아시아를 가다] 몽족의 삶과 애환

청년들 돼지 잡고 떡메 치고, 아낙네들 위스키 만들고…'17일간 새해 잔치'

◆연말 몽족 의식과 '위스키 내리기'

솜차이네 집은 엄마가 둘이다. 첫째인 그의 엄마는 60세이며 딸 다섯 명과 아들 둘을 낳았고, 둘째 엄마는 40세로 딸 둘에 아들 셋을 낳았으니 도합 열두 명인 셈이다. 나란히 붙은 두 집에 살며 들일도 함께 다니는 등 사이가 아주 좋다. 바로 윗집은 부인이 셋이라고 한다. 한 마당 안에 세 집으로 서로 따로 살지만 아침이면 미니 트럭을 타고 같이 들에 나간다.

연말을 맞아 두어 시간 거리, 통부아똥꽃(작은 해바라기꽃)이 많이 피는 마을에서 누나와 매형들이 찾아왔다. 부엌 한쪽에는 17, 18세 마을 청소년들이 스스럼없이 오리 머리를 잘라 피를 받더니, 뜨거운 물에 담갔다 빼내 털을 뽑는다. 밖에서는 두 엄마가 '몽 위스키'를 내리고 있다. 장작불 위에 있는 드럼통에서 시간이 지나자 수증기로 변한 술 방울이 똑똑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또르륵 흐른다. 어둠이 찾아오자 집 안에서 큰아버지 주관으로 연말 의식이 진행된다. 먼저 큰아버지와 엄마 두 사람이 식탁에 앉으면 두 잔씩 술을 따라놓는다. 이어 매형들이 집안 땅바닥 위에서 신발을 벗고 큰절을 올리며, 어른들은 앞에 놓인 위스키를 마시며 덕담을 한다. 이어 25세의 솜차이도 앉는데 나이가 더 많은 매형들이 역시 절을 한다. 아마 장손이어서인 듯하다.

◆돼지 잡는 풍경

마을 청년들이 돼지를 몰고 나온다. 멋모르고 가던 아주 커다란 어미 돼지가 갑자기 무슨 낌새라도 느꼈는지 발걸음을 멈추자 순식간에 아이들이 달려들어 돼지를 넘어뜨리고 위로 올라가 누른다. 마치 맹수가 사슴을 덮치는 듯하다. 이어 하얀 털이 달린 외투를 입은 사내가 오더니 커다란 칼을 받아 단번에 멱을 따고, 소년들은 태연하게 바가지로 피를 받는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끔찍한 살풍경에 고개가 저절로 돌려진다. 이어 돼지 위에 천을 씌우더니 설설 끓고 있는 물을 끼얹고, 아이들이 마치 놀이하듯 수저로 순식간에 털을 벗겨 낸다. 부엌에는 피묻은 칼과 도마들이 널려 있고, 비닐이나 부대 위에는 잘린 돼지머리와 선혈이 낭자한 고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아낙들과 남정네, 사내아이들이 고기를 손질하고, 또 한쪽에서는 고기를 볶고 아이들은 꼬치를 만들어 부산하게 들락거리며 모닥불에 구워 먹는다.

◆한밤중 떡메 치는 소리

이 산중 어디선가 희미하게 떡판 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사내 둘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주거니 받거니 커다란 떡메를 내리친다. 떡메가 올라가는 순간 아낙들은 재빨리 조그맣게 떡을 떼어 바나나잎에 싼다. 몽족은 특별한 날에는 이렇게 메판에 찹쌀을 쳐 꿀이나 가게에서 파는 하얀 액체에 찍어 먹는다. 딱딱하게 마른 후에는 모닥불에 넣어 구워 먹는다. 한 아낙이 선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몇 개 싸주는데, 서로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말보다 더 진한 감동이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장작불 위에는 커다란 고깔모자를 씌운 듯한 양철 솥이 퍽퍽 김을 쏟아내며 잔치에 쓸 밥을 익히고 있다.

여기저기 집 앞에는 아낙들이 틀을 내놓고 새해에 입을 화려한 은장식이 달린 무거운 몽 전통 옷(설빔)을 만드느라 손길이 바쁘다. 건너편에는 겨울 볕 아래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초로의 노인, 그 등 뒤로 살아온 삶의 깊은 고뇌도 같이 흐른다.

매일 잔치하는 집들이 넘쳐나는데 오늘은 여덟 집이, 내일은 가장 많은 스무 집이 한다. 인근의 가난한 '후아이 뽕' 마을 깔리양족 5명이 지나가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더니, 시멘트 바닥에 앉아 서둘러 한 그릇씩 비우고 사라진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프랑스에서 왔다는 30세의 카림이라는 푸른 눈의 사내도 한 명 끼어 있다. 넉 달 일정으로 애인과 함께 이 나라에 왔다고 한다. 꿍텝(방콕)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유명한 관광지인 깐자나부리, 상크라부리, 메솟, 치앙마이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타이에서 가장 높은 산인 도이인타논 국립공원에서 텐트를 빌려 하룻밤 자고 깊은 산 속 마을 매젬을 지나 이곳까지 왔다고 하는데, 그의 여행 내공이 엿보인다. 그 옆에는 핀란드에까지 가서 비닐하우스 화훼 농장과 사과 농장에서 일한다는 31세의 거우라는 사내도 있다. 한 달에 6만3천바트(약 250만원)를 받으며 6개월 일하고 돌아오고 다시 가 6개월을 일한다고 한다. 이곳의 경제사정으로 보면 상당히 큰돈이기 때문에 그 먼 이국도 마다 않고 가는 듯하다.

◆17일가량 이어지는 새해 잔치

이렇게 그들의 잔치는 10일까지 하며 무량대주(無量大酒) 분위기가 이어진다. 취해 같이 마시다가는 큰일 날 듯하다. 3일까지는 마을과 학교에서 전통놀이와 쇼를 보며 논다. 일부 동네 청년들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새우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내려온다. 공기총과 권총을 챙겨가 밤이면 총을 쏘아 인근의 짐승들을 쫓는다. 건너 산에 호랑이까지 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4, 5일에는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인근의 도시 빠이라는 곳에서 12개 마을 몽 부족들이 모여 잔치를 하고, 6~8일에는 치앙마이 인근 매림에서 북쪽 인근 도시에 사는 몽족들이 모여 논다.

오후 5시가 가까워져 오자 다른 집에서 데리러 왔다, 자기들 집에도 빨리 오라고. 그 집까지 가는 길에도 청년들이 서로 불러 술과 고기를 주고, 어떤 집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무까타(고기를 굽고 야채를 데쳐 함께 먹는 것. 무한정 주는 음식이라는 뜻)를 먹으며 손짓을 한다. 한 청년이 '부산 사상구청 공익요원'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 오지 마을까지 저 옷이 어떻게 왔을까.

윤재훈(오지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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