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제주 올레 외돌개 코스

제주 올레 7코스 외돌개 길을 걷는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밥 지어 먹고 서귀포 위미에 있는 숙소에서 길을 나선다. 날씨는 해무가 끼어 흐릿했지만 햇빛이 강하지 않아 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기점에서 바닷가 숲 속으로 들어가니 바람 냄새가 예사롭지 않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 당나귀 코는 벌렁벌렁 코 안이 시끌벅적하다. 쌀쌀한 기운이 오히려 상쾌하고 산뜻하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음악이 없을 수 있는가. 물결이 잦아들어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 얼 산' 하면서 사진 찍는 중국 관광객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그들의 소음을 현대음악으로 이해한다. 이윽고 키 큰 남국의 종려나무 사이에서 휘파람소리 같은 새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새들은 으슥한 숲 속에서 사랑놀이에 몰두하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새소리는 현과 건반의 소리를 능가하는 천상의 음악이다. 겨우 마음이 편안해진다.

새해 벽두에 제주 계획을 세우면서 올레 7코스를 꼭 가고 싶었다. 전체 제주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싶다. 외돌개 바위는 전설 하나를 물고 있다. 바닷가 바위들의 전설이 흔히 그렇듯 이 바위도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할망바위로 불린다. 바위 꼭대기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처럼 풀들이 자라고 있다. 왼편으론 할머니의 이마와 슬픈 눈망울이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벌어진 입은 지금도 할아버지를 소리쳐 부르는 것 같다.

외돌개 바로 밑에는 물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 하나가 있다. 할머니가 애타게 소리치다 돌로 변하자 할아버지의 시신이 떠오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사랑으로 출발하고 있듯이 바닷가 전설의 알파와 오메가도 모두 어화둥둥 사랑으로 출발하여 사랑으로 끝이 난다.

올레길을 걷다가 자원봉사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다. 초창기에는 7코스가 월평포구까지로 되어 있었지만 개편하면서 월평마을의 슈퍼마켓까지 연장되어 16㎞로 늘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5시간 걸어 종점에 도착했다.

느긋하게 쉬지 않고 줄곧 걷는 동안 여러 마을과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명소들을 지나왔다. 특히 두머니물에서 서건도 간의 난코스인 수봉로는 올레길 개척 초창기에 김수봉 올레지기가 곡괭이와 삽 한 자루로 계단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곳에는 황우지12동굴이란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제주 전역을 요새화한 현장이다. 이 해안에 회천(回天)이란 자폭용 어뢰정을 숨기기 위해 12개의 갱도를 팠다고 한다. 이 공사에는 제주인들이 강제로 동원됐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군기지가 조성 중인 강정마을 입구 둔덕에 올라서니 확성기 소리가 요란하다. 사원과 성당에서 불경을 외거나 기도를 드려야 할 승려와 신부 그리고 교인들이 천막 밑에 줄지어 앉아 공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공사장 진입을 막기 위해 땡볕 속에 땀을 흘리고 서 있는 앳된 전경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아직 강정마을 복판으로 진입하려면 이십여 분은 더 걸어야 할 텐데 어릴 적에 맡아 본 적이 있는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바로 찔레꽃 향이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고향 뒷마을이 어른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찔레꽃 덤불 밑 어딘가엔 뱀딸이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니 뱀딸 한 포기가 찔레꽃 냄새를 맡고 있었다. 고향마을과 마찬가지로 올레길에도 찔레와 뱀딸은 서로 짝짜꿍 친구인가 보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잊고 있었던 이연실의 '찔레꽃'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흔들면서 걸었다. 배고픈 생각이 나면 왜 눈물이 날까. 선글라스 밑으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리자 찔레꽃 향이 그새 눈물에 배었는지 향기는 더 진하고 강렬하다.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논에 물 대러 가고 배는 고팠다. 부엌을 다 뒤져도 개떡 한 조각도 없었다. '어머니를 마중하러 가야 한다'는 핑계를 앞세워 뒷배미 논둑을 따라 걸어간다. 찔레꽃 숲에 이르면 가시에 손을 찔려가며 찔레 줄기를 빨아 먹으며 허기를 달래곤 했다. 배고픈 생각이 나면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외돌개 코스는 눈물로 얼룩진 추억의 길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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