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에 등장하는 외국인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혹시 샘 해밍턴을 아시는가요? 한국말로 자기 할 말 다하는 후덕한 외모의 이 호주인은 요즘 방송가를 주름잡으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인기 비결은 훈훈한 외모가 아니라 뛰어난 한국어 실력입니다. 대구에도 외국인이 참 많습니다. 대구시에 따르면 2004년 1만5천26명이었던 외국인 주민 수가 지난해 1월 기준으로 3만2천522명으로 늘었습니다. 10년 만에 두 배 넘게 증가한 셈이지요. 사람들은 대구를 보수적인 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외국인이 대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더 궁금해졌습니다. 이번 주 주인공은 '대구의 외국인들'입니다. 대구 소식을 담은 잡지를 만드는 영어 강사들, 대구 특급 호텔을 호령하는 스페인 출신 총지배인,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까지, 다양한 목적과 그들만의 방식으로 대구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직접 만나봤습니다.
◆"한국어와 씨름해요"
이달 12일 오후 계명대 성서 캠퍼스 바우어관 앞. 외국인처럼 보이는 학생 세 명이 기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날은 계명대 한국어학당에서 시험이 있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인터뷰 약속을 잡은 터였다. 기자가 우리말로 "시험 잘 쳤어요?"라고 묻자 한 명이 "그냥 쳤어요"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냥 쳤다니, 제법 자연스러운 한국어다. "읽기가 어려웠어. 뇌 활동에 관련된 거였는데 이해가 안 됐어. 모르는 단어도 많고." 기자가 대학생 때 토익(TOEIC) 시험을 치르고 친구들과 나누던 대화와 비슷했다.
이들은 계명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라파엘 데 파리아(29'브라질) 씨와 줄리엔 메예르(24'프랑스) 씨, 니키 웹스터(26'미국) 씨는 출신 국가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이지만 한국어 수업을 들으며 친구가 됐다. 한국어를 배우러 대구까지 왔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KGSP, 한국 정부 장학생들이에요." 니키가 설명했다.
KGSP(Korean Government Scholarship Program'한국정부장학프로그램)은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와 장학금을 제공하고, 친한파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목적으로 생겨났다. 1년간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한국어 연수를 거친 뒤 TOPIK(한국어능력시험) 3급을 통과해야 대학 및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으며, 계명대에만 108명의 학생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서울에만 집중되는 유학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지역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학생들이 하루에 5시간씩 강도 높은 한국어 수업을 받으며 시험에 사활을 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댓말, 조사, 어려워요"
니키는 영어, 라파엘은 포르투갈어, 줄리엔은 프랑스어가 모국어다. 라틴어에 익숙한 이들에게 한국어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다. 한국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운 점을 묻자 여러 답변이 쏟아져 나왔다.
"단어 외우는 게 어려워요. 영어를 배울 때는 비슷한 단어가 많아서 쉽게 외웠는데 한국어는 다 처음부터 외워야 해요." 줄리엔이 말했다. 중국인은 몇 분만에 외우는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유럽권 학생들에게 좀체 외워지지 않는 단어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자 라파엘은 "한국어는 동사가 맨 뒤에 오니까 문장을 만들 때 힘들다. 또 포르투갈어에는 조사가 없는데 한국어에는 '을' '를' 같은 조사가 많아서 너무 헷갈린다"며 줄리엔을 거들었다.
존댓말도 이들을 괴롭게 한다. '요'만 붙이면 되는 줄 알았더니 경어체가 발달한 한국어는 그게 아니었다. 프랑스어에도 존댓말이 있지만 한국처럼 복잡하지 않다고 줄리엔이 설명했다. "프랑스어에는 너를 뜻하는 '튀'(tu)와 당신을 뜻하는 '부'(vous)가 있는데 처음 만난 사이에는 부를 써야 해요. 하지만 한국어는 단어에도 존대가 있어요. 이름, 성함, 집, 댁, 밥, 진지 등 뜻은 비슷한데 사람에 따라 다르게 사용해야 하니까 어려워요."
어학당에서 익힌 표준 한국어와 현실과의 괴리도 있다. 대구는 'ㅋ' 발음이 거세고 말이 빠른 경상도 방언의 본고장이다. 이날 기자는 친한 형을 뜻하는 '히야', '뭐라카노', '카지마라' 등 대구에서 흔히 쓰이는 사투리를 즉석에서 가르쳤다. 라파엘은 "대구에서만 쓰이는 사투리도 많고 대구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말하는 것 같다. 특히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말할 때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며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한국어 좋아요"
이들이 힘든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한국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 출신인 줄리엔은 태권도 검은띠 유단자다. 프랑스에서 9년간 태권도를 배웠다는 그는 "태권도 품새를 하며 한국어를 제일 처음 배웠고, 그게 '하나 둘 셋'이었다. 태권도 사범이었던 친구 형이 한국에 몇 번 갔었고, 나도 한국 방송 등을 보며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라파엘은 캐나다 밴쿠버에 있을 때 한국인 친구를 여러 명 사귀었고 그때부터 한국에 눈을 떴다.
니키의 사연은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니키는 몇 년 전 한국 가족과 재회하면서 이곳에 왔다. 니키에게 한국어는 학업인 동시에 가족, 삶과 연관돼 있다. 니키는 "가족들이랑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직 한국어 실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심각한 주제나 어려운 이야기를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아쉬워했다.
한국어가 항상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업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배운 한국어는 저절로 머리에 입력된다. 젊은 층이 많이 쓰는 신조어가 그렇다. 이날 시험이 어려웠다며 "멘붕(멘탈 붕괴의 줄임말)이에요"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구동성으로 아는 은어도 줄줄 읊는다. "불금, 고고씽, 간지난다, 인증샷, 대박. 짱이야. 아, 이것도 알아요. 진짜 쩐다." 기자가 "밀당(밀고 당기기)도 아냐"고 묻자 당연히 안다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니키는 "연애와 관련된 단어는 빨리 학습한다. 한국어는 줄임말이 발달해 실용적인 것 같다"며 웃었다.
이들은 오는 7월 20일 TOPIK 시험을 치른다. 시험 결과에 따라 희비도 엇갈릴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우리말로 '원어민'과 대화하는 외국인 학생들이라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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