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20>화원 성산리 고분군

4, 5세기 화원 지배층 '성채' 성곽·고분군·주거지 한곳에

화원 성산리 고분은 삼국시대 초기 대구의 정치 체제 중 하나였던 설화(舌化)집단이 축조한 분묘다. 전문가들은 성산리 고분군 세력들이 5세기 무렵 신라 팽창 때 달성 세력과 함께 경주의 휘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성산리 고분군 일대. 달성군 제공
화원 성산리 고분은 삼국시대 초기 대구의 정치 체제 중 하나였던 설화(舌化)집단이 축조한 분묘다. 전문가들은 성산리 고분군 세력들이 5세기 무렵 신라 팽창 때 달성 세력과 함께 경주의 휘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성산리 고분군 일대. 달성군 제공

부족국가, 성채(城砦) 국가, 치프덤(chiefdom)으로도 불리는 성읍(城邑) 국가는 인구 1만 명 이하 소국(小國)을 말한다.

인구 3천 명쯤으로 추측되는 청동기 시대 부족단위와 1만, 2만 명 규모였던 삼한, 가야 소국의 중간쯤 단계다. 일반적으로 고대국가의 전 단계에 해당하며 여러 그룹의 소집단들이 일정지역을 분할하고 부족의 중심에 압도적 취락이 여러 집단 위에 군림하는 형태다.

도대체 뭔 얘긴지, 공연히 낯선 용어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럽다면 1천500년 전 화원 성산리(현 화원 동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성산리 토성은 읍락 규모, 성곽, 주변 집단과의 관계, 모든 면에서 성읍 국가의 특성이 잘 녹아있다. 삼국시대 초기 화원지역의 성읍 화원 동산으로 출발해보자.

◆화원 토성은 최고의 군사 요새=우선 성산리 고분의 위치, 지형적 특징에 대해 알아보자. 성산리 고분군은 행정구역상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158번지에 위치한다. 대구의 중심에서 서남쪽에 있으며 전체 지형으로 볼 때 대구의 남쪽 관문에 해당한다.

초기 삼국시대 고분군과 성곽은 대개 한 조합으로 구성된다. 불로동 고분군과 봉무토성, 비산'평리고분군과 달성 토성도 같은 조합이다. 당시 주변의 정치 체제들이 모두 경쟁적으로 성곽을 축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집단 간 긴장관계가 형성됐거나 정복전쟁에 노출되었다는 증거다. 고분들은 대부분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조사된 봉분은 모두 20여 기. 지름이 20m 이상 되는 대형 봉분이 주류를 이룬다.

군사적 개념으로 본 성산동 고분군은 최고의 요새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성이 해발 93m 구릉에 얹혀져 읍락 자체가 성터, 보루 기능을 하고 있다. 서쪽으로 길게 흐르는 낙동강은 천연 해자(垓子)의 역할을 한다. 북쪽으로 직벽을 이룬 단애(斷崖)도 외부 침입을 완벽하게 제어한다.

박승규 영남문화재연구원 원장은 "화원 토성은 금호강과 낙동강의 합수 지점에 있어 두 수역(水域)을 아우르는 최고의 요새"라고 말하고 "4, 5세기 무렵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 패권을 다툴 때 최전방 요새로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평가했다.

◆화려한 금은제 장식, 순장 유적까지=무덤의 주인을 알려면 4, 5세기 삼국시대 대구의 지형도부터 들여다보자. 당시 대구는 4, 5곳의 정치 체제들이 통합, 해체, 정복 전쟁을 통해 성읍 국가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5세기 무렵 대구에 크게 5개의 정치 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신천 상류, 대구 중심권, 북구 칠곡권, 달성군 다사 일대, 그리고 화원 성산리에 집단을 형성한 이들은 각자 영역을 관할 통치했다. 화원 성산리 고분의 주인공들은 설화리, 명곡리 지역을 통치하던 지배층이었다.

피장자들의 신분이나 정치적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부장품을 통해 접근해볼 수 있다. 1999년 경북대박물관이 4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 토기류 428점, 금속류 194점이 출토됐다. 이 중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은제 새 날개 모양 관장식, 금귀고리, 금동제 허리띠장식, 철제 큰칼 등이었다. 관심을 끌었던 왕관의 출토는 없었지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장신구들이 발견돼 피장자의 신분이 수장급이었음이 입증됐다.

비슷한 시기의 달성 고분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점과 비교한다면 비산, 평리동 세력들이 화원 세력보다 정치적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의 위세와 관련해 또 주목할 만한 발굴이 있었다. 주곽에서 발굴된 순장 유적이다. 가야 고분에서 보듯 순장은 생명을 담보로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직접 증거다. 피장자가 이 지역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찜기, 옥 공예품 등 흥미로운 유적 출토=유물 중에 재미있는 유물들이 많다. 우선 6점이 출토된 찜기(甑)가 관심을 끈다. 시루는 그 당시 식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로 당시에 떡, 찜 같은 음식이 대중화되었음을 뜻한다.

섬세한 가공으로 눈길을 끄는 옥 목걸이도 재미있다. 모두 67편으로 구성됐는데 1㎝ 남짓 크기의 옥을 다듬고 구멍을 내는 일은 당시에 상당한 노역이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인골 유적도 있다. '짱구' 형태로 성형된 편두 유골은 발치와 함께 선사시대부터 성형이 유행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례다.

달성군 화원 일대에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성산리 세력은 5세기 무렵 달성 세력과 함께 신라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화원 세력도 설화리, 명곡리 주변까지 거느린 꽤 큰 규모의 읍락이었지만 국제도시로 성장한 신라의 기운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신라 복속 후 사기(史記)에는 화원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무렵 사문진 나루터는 해안과 내륙을 잇는 물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 물길을 따라 신라의 선진 문물이 따라 들어왔다.

인적 왕래도 번창했다. 특히 경덕왕은 성산리에 행궁(별장)을 짓고 9번이나 행차한 일로 유명하다. 화원의 구라리(九羅里)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 되었다. 어가 호위차 왔던 화랑들도 이곳에서 상화대 경치를 감상하며 심신을 연마했다. 이를테면 화원은 신라 왕실의 별장이요, 신라군의 전초기지요, 무역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마무리하며=삼국시대 전통을 이어 고려시대 성산리에는 사찰이 들어섰다. 조선시대에는 봉수, 우편, 파발의 요지로 부상했다.

어느 장소든 역사적 배경이 아닌 곳이 없지만, 화원처럼 특이한 이력을 가진 곳도 드물다. 고대 소국 읍락의 성채에서, 신라시대 왕실의 별장으로, 고려시대 불교의 요람에서 조선시대에는 봉수, 우편의 요지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왔다. 현대엔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 또한 의미 있는 변화라 하겠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