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어제가 없어요

퇴근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교수님, 제 집사람 좀 봐 주셔요. 갑자기 어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응급실에 와있습니다." 정년퇴임 한 직원의 전화였다. 응급실에서 환자 분을 진찰했다. 나를 알아보며 수줍게 인사를 했다.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했으며 마비 증상도 없었다. 신경학적으로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전까지는 모두 기억나요. 그런데 어제가 없어요.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그녀의 MRI 사진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여러 장을 자세히 검토했으나 특별한 이상 소견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검토하던 중 무엇인가 언뜻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확산(擴散) 영상에서 볼펜 끝보다는 약간 굵은 횐 점 하나가 바로 관자엽(측두엽) 해마(海馬)로 생각되는 부위에 보였다. 그렇구나! 아주 작은 뇌경색이 최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에 생겼구나. 그렇게 진단하고 하룻밤 동안 수액 공급을 하고 혈소판 응집 억제제를 투여했다. 이후 그분은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해마는 관자엽 내측에 있는 구조물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잠깐 보관하는 장소다. 정보 중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 폐기되는 단기 기억이 되며, 일부는 대뇌로 보내져 기호화(encoding)되고, 신경세포들이 유전자나 단백질까지 변화시켜 안정된 상태로 저장하는 장기 기억이 된다. 장기 기억은 안정적이어서 오랫동안 존재하며 필요에 따라 끄집어 내 쓴다.

앞의 환자는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해마에 경색이 생겨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뇌의 장기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어 옛날 일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기억이 깜빡깜빡한다고 호소하는 많은 노인 분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금방 한 일을 자주 잊어버리지만 옛날 일은 거의 완벽하게 기억해서 이야기를 한다.

기억에는 어떤 유형들이 있는가? 자전거 타기나 테니스공을 치는 것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절차(節次) 기억이 있고, '겨울은 춥다. 소나무는 푸르다'와 같이 일종의 사전적 기억인 의미(意味) 기억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특정한 사건들에 대한 것을 기억하는 일화(逸話)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시냇물에서 놀다가 신발을 떠내려 보냈는데 누가 고맙게도 건져 주었다는 등과 같은 기억이다. 이것은 인간에만 가능하고 글쓰기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을 필요에 따라 끄집어 내 쓸 때 절대로 저장할 때와 똑같은 상태로 쓰지 않고 미화해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옛날을 회상하면 그립고, 지난 일을 쓰는 수필은 대부분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엮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는 아픈 일화였는데도 말이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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