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전주 이(李)씨다. 어머니는 뿌리가 조선조 왕실 가문에 닿아 있는 것을 은근하게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릴 적 역사책을 읽고 있으면 어머니는 "태조 이성계도 너의 먼 외할아버지란다"라고 말씀하시곤 혼자 웃으셨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었다.
오늘은 강원도 삼척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 답사를 간다. 준경묘란 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 장군의 묘소이다. 뿌리 찾기의 일환으로 준경묘에 가는 것은 아니다. 이 묘소는 나무 중의 나무인 금강소나무(황장목)숲에 둘러싸여 있는 보기 드문 명당이다. 이곳 소나무 중에서도 미송(美松)대회에서 우승한 '미스코리아 파인트리 진'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선 남자든 여자든 잘나고 예쁘면 그냥 놔두지 않는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넘어뜨리고 본다. 나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산림과학원이 한국의 대표 소나무 격인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이 날로 노쇠해 가자 혈통 보존을 위해 이곳 준경묘의 미인송과 교접시키기로 결정했다.
꽃가루가 날리는 철에 적당한 날을 받아 수술의 화분을 암술에 묻혀주면 그만인 것을 '소나무의 혼례식'이라며 거창하게 떠벌렸다. 2001년 5월 8일 신순우 산림청장이 이 혼례식의 주례를 맡아 한국 기네스북에 오른 희귀 찬란한 행사를 주관했다.
김종철 보은군수는 신랑 역을 맡은 이상훈 군(삼산초교 6년)을 앞세워 미인송이 서 있는 곳에 입장했다. 이어 김일동 삼척시장은 신부 역을 맡은 노신영 양(삼척초교 6년)과 함께 혼주석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하여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 혼례식은 수많은 하객과 사진기자들의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혼례식에 이어 바로 합방의 예가 치러졌다. 삼척에서 나무 잘 타기로 소문난 청년이 정이품송에서 채취한 화분을 허리춤에 차고 맨손으로 32m 높이의 미인송 꼭대기로 단숨에 기어 올라갔다. 붓으로 수술 화분을 찍어 미인송의 암술에 묻히는 작업을 한 후 주변나무의 꽃가루가 넘보지 못하도록 비닐포장지를 씌웠다.
이듬해 혼례식을 통해 교접에 성공한 솔씨들이 200여 그루의 아기 소나무로 태어나 모두 산림과학원 묘포장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유전자 검사를 해 보니 아기 소나무의 약 95%는 아버지가 정이품송이었지만 나머지 5%는 아니었다. 비닐 포장지로 그렇게 꽁꽁 싸맸는데도 불구하고 옆집 아저씨가 아버지의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더란다.
그러니까 미인송 입장에서 보면 혼외 아들을 출산한 셈이며 정이품송이 볼 땐 아내의 불륜을 확인한 셈이어서 간통으로 고소라도 해야 할 판이다.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시비로 나라 전체가 한동안 시끄러웠었는데 소나무 세계에도 별반 다를 게 없나 보다. 인간세상에선 '허리하학' 즉 아랫도리 소행이 항상 신문에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황장목 세상에선 꽃술이 있는 윗도리에서 저질러진 행실이 말썽인 모양이다.
정이품송에 얽힌 사연은 또 있다. 정이품송은 보은군 서원리에 있는 서원리 소나무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서원리 소나무는 서방인 정이품송이 삼척의 미인송과 법률혼을 치르기 전부터 정이품 벼슬아치와 혼인을 했다 하여 '정부인소나무'란 칭호를 갖고 있었다. 산림청과 보은 삼척 공무원들의 밀약으로 소나무의 혼례가 성사되자 서원리 주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정부인소나무를 두고 다른 소나무랑 혼례를 하여 자식까지 두었으니 이게 될 말인가." 그래서 1년 뒤인 2002년 뒤늦은 혼례식과 아울러 합방례가 치러졌다. 정이품송은 얼떨결에 두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모르긴 해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피곤했을 것이다.
사람이나 나무나 부인 둘을 거느리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날로 쇠잔해지고 있는 육체에서 꽃가루 정액을 겨우겨우 털어내 미인송에 뿌려주고, 정부인송에 묻혀 주어야 하는 고달픔을 인간들은 모를 것이다. 난봉기 많은 남정네 가정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능히 알 수 있다. 검찰총장네와 신정아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청와대 비서관 댁의 사정이 정이품송이 겪고 있을 아픔과 무엇이 다르랴.
정이품송의 수난은 조선조 세조 행차 때부터 시작됐다. 임금이 탄 가마가 지나갈 때 마침 회오리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들린 것을 두고 신하들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단종을 죽이고 등극한 세조가 소나무에 정이품이란 벼슬을 내린 것과 소나무끼리 합방례를 치른 것까지도 사실은 '망가'(만화를 비하한 말) 수준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산천을 희화화시켜 그걸 들여다보고 웃고 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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