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들이 아침을 깨운다. 그들은 나와 눈을 맞추려고 고개를 쭉 내민다. 내가 그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키운다. 관음죽은 우리 집에 온 지 20년이 넘었고, 대부분 나무와 화초들이 십수 년을 같이 산 가족이다. 철 따라 피는 꽃들은 내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된다.
화가는 어떤 소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혜원 신윤복의 기녀들, 이중섭의 황소, 김창렬의 물방울 등 특정 소재가 화가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신'이 된다는 것은 하늘이 복을 그저 퍼다 주는 것은 아니다. 혼신의 노력이 뒷받침될 때 이루어진다.
자그마치 말을 40만 마리나 그려서 이름을 날린 화가가 있었다. 당나라 때의 화가 한간(韓幹'751년경~781년경)이다. 그를 떠올리면 '위대하다'는 평가에 앞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40만 마리를 그린 연후에야 말 그림에 명함을 내밀라는 것이다. 눈 감고도 사물을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는 천재적인 솜씨는 지독한 끈기와 인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걸작 '조야백도'(照夜白圖)에는 낙관과 감상자, 수장자의 인장이 수없이 찍혀 있다. 말 그림의 '일인자'임을 모든 사람이 보증한 셈이다.
일설에 따르면, 한간은 무식자였지만 왕유(王維, 699?~761)에게 재능을 보여 10년간 그림을 배운 끝에 화가로 등단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간이 당대 제일가는 스승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한간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현종(玄宗'685~762)이었다. 그 시대만 해도 말은 귀한 동물이어서 궁정에서만 취급했다. 특히 현종은 말을 좋아해서 40만 마리의 말을 소유하고 있었다. 현종은 사냥을 가거나 행사를 거행할 때 반드시 화가를 데리고 다니면서 현장을 사생하게 했다. 한간은 현종의 눈에 띄어 궁정의 말을 그릴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 그는 현종의 애마 '조야백'을 그려서 명성을 얻는다. 조야백은 눈처럼 하얀 몸이 둥근 달처럼 환하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야백은 수려한 풍채와 씩씩한 기상을 가져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한간의 '조야백도'는 말의 강인하고 수려한 외모를 강건한 필선으로 담박하게 나타냈다. 풍만한 엉덩이를 유려한 선으로 부드럽게 나타낸 반면 날 센 갈퀴를 가지런히 하되 윤기나도록 수분이 적은 갈필로 표현하였다. 푸른 초원을 닮은 눈빛은 사막을 떠올리게 한다. 고고한 외모는 가히 귀족적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고 했다. 그저 얻어지는 '대박'은 없다. 신의 경지에 도달한 말 그림의 달인도 따지고 보면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이다.
우리 집 발코니에는 난초가 꽃망울을 물고 있다. 조금 있으면 그윽한 향기가 내 그림을 물들일 것이다.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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