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노란색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해바라기의 비명'은 함형수 시인이 1936년 문예지 '시인부락' 창간호에 발표한 시이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죽음마저도 초월한 화자의 강렬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육신은 죽어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처럼 정신은 영원히 남아서 우리를 일깨우고 큰 힘을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 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약간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해바라기는 대개 8, 9월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데, 그 '노오란' 빛이 봄이나 초여름에 푸른 빛을 띠는 보리밭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를 읽으면서 그런 부분에 집중해서 시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시에 등장하는 '노오란 해바라기'나 '푸른 보리밭'은 실제 해바라기나 보리밭의 의미보다는 그것들이 가진 속성에서 비롯된 상징적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보리는 겨울에 밟을수록 더 튼튼하고 푸른 밭을 이룬다. '푸른 보리밭'은 어려운 상황과 억압을 이겨낸 것이기 때문에 그 말에서 강한 생명력과 저항 정신을 연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데 해바라기의 경우는 좀 다르다. 해바라기는 항상 해를 향하고 있다는 속성으로 인해 좋게 보면 일편단심을 떠올릴 수 있고, 나쁘게 보면 권력만을 쳐다보는 부정적인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시에 쓰인 '노오란 해바라기'에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명령형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확신과 노란색이 가진 의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란색은 기본적으로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이다. 밝고 따뜻하기 때문에 인간적이면서 희망을 의미하는 색이기도 하다. 47억원이라는 살인적인 파업 손해 배상 금액이 부과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4만 7천 원씩 기부하는 운동이 '노란 봉투 캠페인'인 것은 이 운동이 가진 따뜻한 인간미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힘이 노란색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조의(弔意)를 표하는 검은 리본이 아니라 노란 리본을 달고 있다. 이 노란 리본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세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굳은 다짐이 될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능인고 교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