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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거인에게 길을 묻다] 제3부 김수환 추기경 4)용기와 반성의 리더십

"안중근 파문? 살인 아니다" 고쳐야 할 일은 신념따라 행동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1990년 9월 24일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펼친 신뢰회복운동에 동참해
김수환 추기경이 1990년 9월 24일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펼친 신뢰회복운동에 동참해 '내 탓이오' 스티커를 승용차 뒷유리에 붙이고 있다. 매일신문 자료사진
김수환 추기경이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개원 법요식에 참석해 관응 큰스님(직지사 조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 추기경은 이날 기념축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개원 법요식에 참석해 관응 큰스님(직지사 조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 추기경은 이날 기념축사에서 "길상사가 맑음과 향기가 솟아 나오게 하는 샘으로서 큰 도량이 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했다. 김수환 추기경 생질 정영웅 씨 제공

한국 천주교회는 군사독재 시절 인권과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위험에 맞섰고, 곤궁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도 앞장섰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그때까지 맞닥뜨린 문제는 어떤 면에서 '외부의 일'이었다. 1990년대 천주교회, 아니 김수환 추기경에게는 스스로 반성하고 용기 있게 해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부끄러운 84년 역사 청산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했다. 이는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에게 한국의 독립 염원과 희망을 알린 사건이었다. 우리 역사 역시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 최고 지도자였던 프랑스 출신 뮈텔 주교는 조선 식민지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다. 게다가 교회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대립하면 다시 박해를 받을 위험도 있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의사를 종교 계율을 어긴 살인자로 규정하고 파문했다. 이후 가톨릭 역사에서도 안중근 의사는 여전히 살인을 금하는 종교적 계율을 어긴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세계적으로 적용되는 교회법이 있고, 교회 역사에 기록된 사실을 정정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명이 있어야 했다. 가톨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쏜 안중근 의사를 종교적으로 복권시키는 일은 일반인의 인식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가톨릭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의 무력침략 앞에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땅의 국민들이 자구책으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아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정당방위입니다.'

이로써 추기경은 안중근 의사를 84년 만에 가톨릭 사상에 근거한 평화주의자요, 인권운동가로 정체성을 복원시켰다.

추기경은 또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면 먼저 일제 치하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던 어른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일제 당시의 제도교회가 올바르게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했다고 보기 힘든, 한국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친일적인 행위가 있었음을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마음 아파합니다"고 덧붙였다.

타인의 잘못 혹은 집단 밖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나아가 자신의 잘못,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잘못을 반성하고 바로잡기는 무척 어렵다. 그것이 종교에 관한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김수환 추기경은 반성을 통해 '통념'을 깨는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진보'보수는 답이 아니다

김 추기경에게 '반성'은 종교계에 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김 추기경은 6'29 선언 이후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이기주의가 더 강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사회 전반에 급진적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대립이 심화되어 갔다. 정당이나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급진적인 단체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천주교회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김 추기경은 이런 현상에 대해 국가와 국민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야 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권리를 더 찾아온 만큼,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의무도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당시 김 추기경은 '급격한 변화의 추구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게 되므로, 변화는 가장 민주주의적 방법과 대화를 통해 꾸준히 참고 견디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추기경의 이 같은 태도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진보적 인사'의 대명사로 인식되던 그를 보수적 인물로 비치게 했고,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김 추기경을 비판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이에 대해 "나라를 위한다는 같은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고 했다. 민주화가 안 되었을 때는 민주화를 추구했고, 민주화 과정에서 혼란이 생겨 우려를 표명한 것이라는 말이다.

김 추기경은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해도 좋다고 말했다. 옳고 그름, 사람과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은 진보나 보수라는 가치로 재단될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실제로 김 추기경에게 보수는 곧 폐쇄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었다. 김 추기경은 보수적이었지만 이른바 '진보 인사들'보다 더 열려 있었다. 김 추기경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로 대립하고 갈등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다. 그 자신은 보수적이었지만 열려 있었고, 배타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종교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다른 종교에도 시종 열린 태도를 보였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 유교식으로 술을 따르고 재배하는가 하면,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개원 법요식에 참여하는 등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나는 용기가 없었네"

김 추기경은 주교가 되기 전부터 복지시설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대구에서 신부생활을 할 때 희망원이라는 복지시설을 들락거리면서 행려자와 장애인들 속으로 투신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나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주교로 임명됐다."

김 추기경은 이를 두고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음에도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은 주교나 추기경이란 직책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용기가 없어서였다. 더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은 내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평화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사회의 어른들은 흔히 후배들에게 '용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스스로 '용기가 부족했음'을 고백함으로써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1997년 IMF 사태로 한국 사회는 6'25전쟁 이래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다. 이때 '형편이 더 나빠져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 추기경은 "한국 사회가 오늘보다 더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 각자가 정신을 차리고 반성하고 쇄신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김 추기경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가 너에 대한 정의의 심판보다, 나에 대한 자성과 심판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개혁할 것이 없는지 깊이 생각하고 생활을 바꿔 나가야 할 때라는 것이다. 즉 각자가 자기반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기 삶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고쳐 나가기보다 타인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김 추기경은 일찍이 각자의 각성 없이는 한국 천주교회와 한국 사회는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타인에게 반성을 요구하기는 쉽지만, 스스로 반성하기는 어렵다. 김 추기경은 시종일관 자신부터 둘러보자고 말씀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떤가?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원망하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부터 반성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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