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는 근(近)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는 SF 장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우주공간에서 생활하며, 방사능을 차단하기 위해 갑옷처럼 온몸을 감싸는 옷을 입고 레이저빔을 쏘며 격투하는 액션에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없다. 등장인물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방식은 우리의 현재 생활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차차 변모하는 단계에 있는 우리들의 한 20년 후, 30년 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SF 로맨스 영화의 이야기는 가까운 미래에 가능해질 사랑 방정식일 뿐 아니라, 어쩌면 지금 여기에서도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테어도르(호아킨 피닉스)는 남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생일에, 혹은 기념일에 테어도르는 의뢰인이 보내온 사진과 사연들을 가지고 감정을 담아 편지를 쓴다. 그는 실력 있는 편지 작가다. 사랑이 가득한 편지와 다르게 그는 현재 아내와 별거 중이며 곧 이혼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테오도르는 벽면을 가득 메운 스크린 위 게임 캐릭터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휴식 시간을 보낸다. 아내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수시로 떠올라 그를 더욱 외롭게 하는데, 소개팅에서 만난 매력적이며 적극적인 여인과의 데이트도 그의 주저함으로 망치기 일쑤다. 이런 외롭고 쓸쓸한 중년남자에게 어느 날 불현듯 사랑이 찾아온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컴퓨터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 충만한 상태다. 비서이자 친구이자 아내이자 섹스 파트너인 그녀 사만다가 있기에 그는 행복하다. 잠이 오지 않으면 사만다와 이야기를 나누고, 홀로 있고 싶어질 때면 그녀는 물러날 줄 안다. 속속들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사만다는 그가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으며, 적절한 때 성적으로 유혹하여 그를 만족시킨다. 완벽한 그녀의 유일한 문제는 육체가 없다는 것뿐이다.
최고의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 테오도르를 세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바라본다. 미친놈으로 보거나 이해하거나. 어떤 애인이라도 단점은 있게 마련이니 육체가 없는 목소리의 그녀 사만다를 테오도르는 놓지 않는다. 함께 여행도 떠나고, 조카에게 인사도 시키며, 친구 커플과 더블데이트도 즐긴다.
그러나 오직 그만의 그녀일 때, 세상에서 독점적으로 그 사랑을 소유할 때에라야 둘의 애인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인간의 사랑 방정식이다. 테오도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인식했을 때 그의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한 미래 상황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점점 더 관계 맺기에 힘들어한다. 현대사회의 스트레스는 사람을 자꾸만 위축시켜서 바깥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인터넷을 헤집고 다니면 원하는 모든 정보가 다 있고, 손에서 놓지 않는 스마트폰은 다른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보다 훨씬 낫다. 디지털 시대의 편리함은 인간 대 인간의 정으로 묶이는 관계를 부담스럽게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앉아 각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모습은 익숙한 광경이 되어버렸다.
이 영화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삶의 공허함을 경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이버세계에서 모든 욕망들을 충족해 나감으로써 정작 주변 사람들 서로에게 박탈감을 부여해주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닌지 성찰하게 한다.
'그녀'는 올해 아카데미영화제와 골든글로브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감독 스파이크 존즈는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어댑테이션'(2002) 등 자아 정체성에 대한 꾸준한 관심사를 가지고 자신만의 특별한 작품 세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사람이 아닌 대상과의 사랑을 담은 성찰적인 영화 몇 편을 더 추천하고 싶다. 가상의 사이버 캐릭터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감독의 이야기인 '시몬'(2002), 인형의 슬픈 사랑 이야기인 배두나 주연의 일본영화 '공기인형'(2009), 입양된 로봇 아이가 버림받게 되자 사랑을 찾아 떠나는 피노키오의 SF 버전 'A. I.'(2001), 판타지 속 사랑을 보여주는 '펀치 드렁크 러브'(2002). 이 영화들 모두가 담고 있는 디지털 기기에서 위안을 찾는 현대인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가 심상치 않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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