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은 선진사회의 필수 조건으로 공공성과 투명성을 첫손에 꼽는다. 공공성은 사회 양극화나 빈곤, 기회의 불균형, 불확실성, 재난 등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리스크를 법과 제도적 장치로 예방하고 완충하는 공적 개념이다. 투명성은 소수 기득권층이 의사결정을 독점해 왜곡하거나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열린 사회의 구조를 의미한다. 만약 공공성이 희박하거나 투명성이 결여된 사회는 계층 간 이해 충돌을 조절할 능력이 떨어져 늘 체제 불안과 환난을 부를 수밖에 없는 후진사회다.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의 공공성'투명성의 현주소는 어떤가. 19세기 조선 후기의 향약문에 보이는 환난상휼,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와 같은 덕목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나 기업의 공공성과 투명성 제고에 관한 노력은 시민의식의 진화만큼 그 보폭이 크지 못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이 표출되고 가치 충돌이 표면화되면서 국가경영의 편의상 공적 개념을 끌어들여 겨우 기초적인 공공성과 투명성을 읊조리는 단계다. 참여정부 때 정책적으로 공공성을 실험하고 적용한 적은 있지만 정권이 바뀌자 그 틀이 허물어졌다. 지금 우리는 그나마 남은 공공성의 잔해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공공성과 투명성에 대한 역사적 선택을 요구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한국 현대사를 뒤바꿔놓을 중요한 사건이라는 인식도 있다. 304명의 아까운 목숨이 희생된 단순한 사고의 차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구성원 모두가 예의주시하며 체제 변혁의 터닝 포인트로 보고 있다. 외신은 우리의 도덕성 회복과 책임감에 대한 국가적 성찰의 분위기를 놀라워하지만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도 엄연히 존재한다. 공적 네트워크를 왜곡시키며 기득권을 지켜온 관피아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특권을 위해 비정상을 정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이런 계층 집단은 결코 자신의 기득권을 순순히 내놓은 적이 없다. 얽히고설킨 탐욕의 중층구조는 기묘한 수사법을 만들어냈고 특권의 포기란 결코 있을 법한 결과가 아니다. 지금은 숨죽이며 도화선의 심지를 지켜보고 있지만 단기적 손실을 넘어선 체제의 붕괴는 결코 그들의 염두에 없다.
'디 람뻬두자(di Lampedusa) 원칙'이 있다. 변화를 통한 불변의 유지전략인데 귀족이나 소수 특권층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용어다. 19세기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가 주제페 디 람뻬두자의 소설 '살쾡이'에 나오는 귀족의 처세술과 가치관을 빗댄 것이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에게 "만사를 전과 같이 유지하려면 모든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대화에 나온 것으로 변화의 틀을 제 손으로 만들거나 적은 물론 내부마저 기만하는 전략이다. 그들은 "봐라, 우리도 이제 이렇게 바뀌었다"며 모두를 속이는데 익숙하다.
그나마 우리 사회가 기댈 것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이다. 이 참사에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려는 성찰의 힘이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각성은 더욱 강력해야 한다. 조용한 성찰로 끝난다면 세월호의 교훈을 영영 물 위로 끌어올릴 수 없고 사회 변혁의 수준이 아니면 요요현상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국민검사' 안대희 총리지명자의 사퇴 파동만 봐도 우리 사회가 어떤 지경에 처했는지 알 수 있다.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말처럼 탐욕은 매우 침투력이 강한 감정이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체제와 사회구조 변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욕구와 성찰의 힘이 크게 증폭돼 혁신의 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변화와 혁신에 저항하는 관피아와 물질 만능주의, 성과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도도한 의식혁명의 물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대통령이 도도새의 법칙을 언급하며 진화를 촉구하든 디 람뻬두자 원칙을 꺼내 들든 이는 사회를 파탄으로 몰고 온 기득권층이 선택할 문제다. 나쁜 정치와 탐욕이 선진사회로 가는 길목을 막고 정책과 시스템을 죽이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한다. 냉전과 세계 체제에 반기를 든 1968년 5월 파리는 '아듀 드골'을 외쳤다. 우리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쪽이 선택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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