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일의 생각] 초교 동문회에 나온 누님들

지난 일요일, 시골 초등학교 총 동문 체육대회에 다녀왔다. 올해는 1960, 7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동문들이 모였다. 쉰을 훌쩍 넘긴 중년들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여느 동문회와 달리 여성 동문들이 많았다. 동이, 진희, 남희, 춘덕, 끝분 등 어릴 적 한동네에 살았던 누님들의 얼굴도 보였다. 시집간 후 30년 이상 만나지 못한 누님들이다.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음식점을 한다는 누님은 '이제는 살만하다'고 했다. 아들 녀석을 의사로 키운 누님도 있었다. 그 누님은 누구보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말이 길었다. 한 누님은 아들딸이 용돈을 보내온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 누님들은 우리 사회 격변기를 고스란히 거친 베이비붐 세대(1955~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초등학교 시절 국민교육헌장과 반공교육, 유신찬양, 새마을 노래를 달달 외면서 공부했다. 그러나 경제개발 혜택은 누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다.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니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누님들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진학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내년 농사가 잘되면 보내줄게'라고 약속했지만 진학한 누님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부모님에게 대들지는 못했다.

항상 오빠가 먼저였다. 상급학교 진학은 물론 옷과 음식까지 항상 남자 형제에게 밀렸다. 자식이 대여섯이나 되는 시골 살림에 모두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기에 누님들은 항상 희생되고 소외됐다. 메이커 옷은커녕 언니들이 입던 헌옷을 물려받아 입었다. 진학할 길이 없자 몇몇 누님들은 지인의 소개로 대구나 마산 방직공장에 취직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물론 이들이 번 돈은 고향으로 보내져 송아지나 돼지 새끼를 사거나 오빠, 남동생 등록금에 쓰였다. 자신을 위해 써본 적이 없었지만 원망 한마디 않았던 누님들이었다.

누님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결혼,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세월을 보냈다. 쉰이 넘은 인제야 여유가 생겼다. 시간이 생겼으나 갈 곳이 없었다. 연말이나 신년 때 매스컴에서 동창회니 동문회니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누님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누님들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초등학교 동창회나 동문회뿐이었다.

40, 50년 만에 찾은 학교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렇게 커 보이던 운동장이며 교실이 작게만 보였다. 그러나 누님들은 꿈많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운동장에서 친구와 뛰어놀며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입학생이 적어 학교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온다. 예쁜 누님들을 위해서라도 학교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 내년에도 환한 미소를 띤 누님들을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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