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애월 부근에서 해변 염전을 처음 보았다. 노천 바위 위에 바닷물을 부어 햇빛의 열기로 졸여 소금을 만드는 곳이다.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16㎞ 떨어진 구엄마을이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어 왔다. 제주 사람들은 이곳을 '소금 빌레'라 부른다. 소금은 인간이 경외하고 경배를 드려야 마땅한 정말로 귀한 물질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사람들에게 희생과 봉사의 덕목을 가르치면서 '빛과 소금'에 대한 비유를 들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보면 빛과 소금이야말로 자신을 태우고 없애면서 타에 유익을 주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존재 가치는 바로 희생이다.
차마고도라는 TV 프로그램은 소금과 차에 관한 기록이다. 이 프로는 제작 이후 인기리에 계속 재방송되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낯선 풍광 속에 화면 구성이 좋은 덕도 있지만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의지가 볼만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 중에 중국 윈난성 난창강변 옌징 지역 강기슭에 있는 소금 우물에서 물을 퍼 소금을 만드는 광경이 나온다. 이곳 여인들은 30~40㎏의 소금물을 등짐으로 날라 협곡 주변 다랑논처럼 생긴 붉은 땅에 붓는 작업을 하루 종일 계속한다. 복숭아꽃이 피는 4~6월에 생산하기 때문에 이때 만든 소금을 도화염이라 부르며 고가에 팔린다. 여자들이 만든 소금은 남자들이 말 등에 싣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몇 개월에 걸친 행군 끝에 식량과 생필품으로 바꿔 돌아온다. 이렇듯 이곳의 소금은 지역 주민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소금 우물은 수만 년 전 지각변동이 일어날 때 바닷물이 산으로 끌려 올라가 골짜기 틈새에 자리를 잡은 것이 우물로 고여 있었던 것이다. 잉카 유적이기도 한 페루 마라스 마을의 계곡 속에 있는 살리나스 염전도 이와 비슷하다.
해저 융기로 계곡에 암염이 깔려 있었는데 만년설에서 녹아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통과하자 잉카인들은 계단식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했다. 지금도 옛날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으며 아토피 피부염에 특효라는 소문 때문에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다.
이외에도 볼리비아에 우유니 소금 사막이 있으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교에도 소금 광산이 있다. 또 폴란드 비엘리츠카에 소금 광산이 있고 미국의 솔트레이크 시티에 있는 호수도 물이 차츰 줄어들어 소금 사막으로 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구 곳곳에 널려 있는 사막, 광산, 계곡 등 소금 산지들은 옛날 방식대로 소금을 생산하거나 아니면 관광지로 변신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제주 구엄마을 소금 빌레는 훌륭한 자원과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썩히고 있다. 해변 도로변에 고작 작은 광장 하나를 만들어 소금 빌레의 역사와 소금 만드는 법을 팻말에 붙여두고 있을 뿐이다.
이 동네는 고려 원종 12년 삼별초군이 애월읍 항파두리에 주둔할 당시 마을로 조성된 곳이다. 당시 마을 이름은 엄장포 또는 엄장이로 불렀다. 그 후 조선조 명종 때 강려 목사가 부임하면서 바닷물을 햇빛으로 끓이는 소금 제조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소금 빌레는 해안을 따라 길이 300m, 너비 50m, 면적 4천960㎡(1천500평)규모로 평평한 바위 위에 조성됐다.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알갱이가 굵고 넓적한 데다 색깔과 질이 뛰어나 해마다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했다. 소금 빌레는 지난 390여 년 동안 주민들의 생업 터전 구실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해변 바위는 고저가 들쭉날쭉하여 평균 수위를 유지하기 위해 찰흙으로 15㎝ 높이의 경계 둑을 쌓았다. 구획이 나눠진 방을 '물아찌는 돌'(호갱이)이라 불렀다. 허벅으로 퍼온 바닷물을 호갱이 안에 부어 7일 정도 햇빛으로 졸이면 명품 소금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소금 빌레에서 연간 2만8천800근(17t)의 소금을 생산하여 보리, 조, 콩 등 곡식과 물물교환을 했다고 한다.
소금 빌레는 봄부터 가을까지만 소금을 생산하고 파도가 센 겨울에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이곳 돌 염전은 공유수면이긴 하지만 개인 소유가 인정되어 매매가 자유로웠다. 한 가구당 66~99㎡(20~30평)씩을 소유했으며 큰딸에게만 상속이 가능한 풍속이 오래 지속되었다.
이곳 소금 한 되는 보리 두 되와 맛 바꿀 정도여서 소금 빌레의 부동산 가치는 육지 밭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1950년경부터 염전의 기능을 서서히 잃어 지금은 눈요깃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소금 빌레의 전통이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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