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지켜온 '대구 클래식의 향기' 지다.'
2011년 10월 7일 매일신문 28면에 실린 기사 제목입니다. 이 기사 속에는 '대구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기사가 지면에 나기 전날, 대구의 클래식 음악의 시원이자 메카였던 음악감상실 '녹향'의 이창수 대표가 90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고 이 대표는 유명한 정치인도, 학자도 아니었지만 신문은 그의 죽음을 크게 애도했습니다. "녹향을 지키다가 떠나는 것이 소원"이라던 말처럼 그는 1946년 문을 연 음악감상실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합니다. 특히 도심은 유행을 더 빨리 흡수하지요. 한 달 전까지 커피숍이 있었던 자리에 옷가게가 생기고, 1년도 채 안 돼 또 다른 커피숍이 옷가게를 밀어냅니다. 이러한 흐름과 반대로 수십 년째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평범한 가게들을 찾아봤습니다. 60년 역사의 세탁소, 48년 된 양복 집, 50년 된 카메라 가게 앞에서 10년 경력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세월의 무게만큼 쌓인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역사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소백사, 세탁 역사 60년
'구두 골목'으로 유명한 대구 중구 향촌동. 원래 이곳을 찾은 목적을 구두 장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무턱대고 가장 오래된 수제화 가게를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즐비한 구두 가게에 자리 잡은 낡은 세탁소에 눈이 갔다. 다림질하고 있던 주인 할머니(67) 에게 "가장 오래된 구두 가게가 어디냐"고 물었다. "여기 처음 이사 올 때 저 집 애가 아장아장 걸었는데 지금 24살이라 카대. 저 집도 꽤 오래됐지. 저 앞에 가게가 초가집일 때 우리가 이사 왔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
세탁소를 찬찬히 둘러보니 이곳이 '물건'이다. 삐걱거리는 대문,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고철 선풍기, 로마자 표기법을 무시한 '전자 크리닝 센타'라는 간판까지 모든 것이 낡아 보였다. 이 세탁소는 얼마나 됐을까. "향촌동에서 한 35년,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한 25년 했으니까 60년 됐겠네." '소백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소백사는 대구 세탁 역사에서 금수세탁소와 쌍벽을 이루는 곳이다. 대구 최초의 세탁소는 자갈마당 옆 금수세탁소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영업하지 않는다. 60년 역사를 증명하듯 이곳은 작은 박물관 같다. 소백사가 향촌동으로 이사 왔을 때 단 선풍기는 올해로 35살이 됐다. "옛날 꺼는 고장도 잘 안나. 겉만 멀쩡한 요새 것보다 훨씬 낫다고. 아직도 돌아간다니까." 바로 밑에 달려있는 신식 선풍기가 들으면 머쓱해질 소리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다리미다. 할머니가 다림판 밑에 있던 흰 비닐봉지를 풀어헤쳤다. "이거 70년 된 다리미야. 여기로 이사 올 때 가지고 왔는데 안 펴본 지 한참 됐어. 아이고. 이게 다 고물이 됐네." 손때 묻은 나무 손잡이와 녹슨 철판에서 70년 흔적이 느껴진다. 다리미에 세월의 무게가 업혔는지 한 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다. 낑낑대는 기자를 보고 "옛날에는 이 돌덩이로 다림질을 했다"며 할머니가 깔깔 웃는다.
◆요정 기생들이 최대 고객
소백사의 전성시대는 박정희 정권 때였다. 소백사가 중구 동일동 아카데미극장 앞에 있었을 때 주요 고객은 인근 요정(料亭)의 기생들이었다. 여름철 모시 한복을 입고 걸어다니는 기생을 보는 것도 진풍경이었다. "요정에서 한복을 많이 맡겼어. 요정 한 집에 기생이 사오십 명 되니까 한복이 얼마나 많았겠어. 그때 우리 세탁소에도 일하는 사람이 서 너 명 됐어. 한복 하는 사람, 양복 하는 사람, 심부름, 빨래하는 사람, 그때는 일꾼도 참 많았지." 이름을 물어도 끝내 말하지 않던 할머니는 "아카데미 종로 소백사라고 하면 옛날 사람들은 다 알아"라며 빙그레 웃는다.
한복은 양복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갔다. 일이 밀릴 때면 할머니는 하루 2시간 쪽잠을 자면서 저고리 동정을 달기도 했다. "말기라고 알아? 한복 치마 맨 위 허리에 다는 건데 말기를 다 떼서 새로 다 달아줘야 했어. 말기 달고, 치마 다림질하고, 저고리 동정 달고. 한 손으로 우리 애 젖 먹이면서 저고리 동정을 달고 했다니까."
50년 전 세탁소는 빨래를 돈 주고 맡길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금 한 돈에 2천400원할 때 양복바지 드라이클리닝 비용이 150원했던 시절이었다. 시대를 주름잡았던 대구 '조폭'들도 소백사에 양복을 맡겼다며 할머니가 귀띔했다. "시내에 '영진양복점'이라고 있었는데 그때는 기성복이 없으니까 이 집에서 양복을 맞춰 입는 사람들이 많았어. 옷이 귀하니까 세탁소에 맡겼지. 옷 훔쳐갈까 봐 세탁소 지키는 것도 일이었지."
호시절은 정권이 바뀌면서 끝났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많던 요정들은 모두 삼덕동으로 옮겨갔다. 당시 요정이었던 공간은 사라졌거나, 대부분 식당으로 바뀌었다.
◆"요즘 사람들, 옷 귀한 줄 몰라"
스팀 다리미의 등장으로 소백사는 또 한 번 내리막길을 걸었다. 신기술이 나오면서 세탁소는 우후죽순 늘어났고, 일감은 급격히 줄었다. 70년 된 무쇠 다리미의 무게에 놀랐던 기자에게 할머니가 스팀 다리미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진짜 가볍지? 요새 다리미는 옷에 눌어붙지도 않지. 참 세상 좋아졌어." 이전까지만 해도 세탁소를 하려면 '기술'이 필요했다. "우리 영감은 침을 탁 뱉어서 다리미에 대면 소리만 듣고도 온도를 알아맞췄어. 그때만 해도 세탁소를 아무나 못 차렸지. 세탁소 남자가 기술 좋다고 해서 스물네 살 때 시집 왔구만." 할머니가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세탁 기술을 배워 소백사를 이어온 사람은 주인 할아버지(71)이지만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할머니 혼자 가게를 도맡고 있다.
세탁소 안에는 '1개월 안에 옷을 안 찾아가면 처분합니다'라고 적힌 안내문도 있었다. 할머니는 옷이 귀한 줄 모르는 요즘 사람들을 타박했다. 와이셔츠를 수건에 둘둘 싸 세탁소로 가져올 만큼 옛날 사람들은 옷을 귀하게 여겼다. "어휴, 요즘 사람들은 옷을 맡겼다가 안 찾아가. 여러 번 처분했어. 옷이 천지에 널렸으니까 귀한 줄 몰라."
다시 세탁소를 둘러봤다. 이곳에서 가장 새것은 '파워 클리닝'이라고 적힌 세탁기계다. 언제까지 세탁소를 할지 모르겠다던 할머니가 약 5년 전 들인 기계다. 소백사가 언제까지 명맥을 이어갈지 알 수 없다. 밤을 밝히던 노란색 '세탁' 전광판을 떼서 바닥에 내려놓은 지도 오래다. "올해까지만 하고 안 할 거야. 저 봐. 전광판도 떼놨잖아. 애들도 다 시집갔고. 그런데 또 모르겠어. 내년에도 할란지." 소백사에는 지금도 꾸준히 찾아오는 단골이 있다. 할머니가 이날 다리고 있던 바지는 30년 고객이 맡긴 옷이었다. 할머니는 "범물동에 사는 사람인데 꼭 우리 세탁소에 옷을 들고 찾아온다"며 정성스레 다림질을 이어갔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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