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매화 4 - 도산서원-강수완(1964~ )

요즘 같은 달밤 선생은 젊잖게 뒷짐을 지고

헛기침 험험 매화 속으로 슬쩍 미끄러져 드셨을까나

아득하게 향기를 품은

글을 읽다 말고 문밖에 누가 온 것 같아

휘영청 보름밤에 창호지 문을 뽀얗게 열고

지그시 눈을 감아

목젖에 감겨오는 마음 하나 가지에 걸었을까나.

-36집, 2014.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물으면서 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은 묻는 이가 많지 않다. 퇴계 선생은 풍기 군수 이후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 도산으로 내려와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 수십 번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벼슬이 내려질 때마다 사직 상소를 올리거나 마지못해 부임했다가도 이내 사직하고 다시 도산으로 내려오곤 했다. 선생이 도산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선생은 도산의 자연을 텍스트로 삼아 자연에서 배우고 도(道)에 이르려 하셨다.

선생은 특히 매화를 사랑했다. 그래서 매화라 하지 않고 존중하여 매형(梅兄)이라 불렀다. 옛 선비들이 사군자라 부르는 매화는 설중매(雪中梅)를 가리킨다. 눈 속에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피는 품성이 선비의 매운 기개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위인들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유언을 남기는데 퇴계 선생의 마지막 말씀도 '매형께 물을 주어라'이다.

시인은 매화 핀 도산서원을 걸으며 매화를 사랑했던 한 선비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인의 상상력은 시간을 거슬러 글을 읽고 매화를 완상하는 조선의 한 선비를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 선생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의 도산서원을 거닐며 매화를 완상하신다. 선생의 선비정신과 거동에서 은은한 매화향기를 느낄 수 있다. 시인의 상상력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시를 통해 가능하게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조선의 선비를 만난다는 것은 시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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