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오지 기행 아시아를 가다] 몽족의 삶과 애환

산마을 모든 행사 용품 '오바또'서 무료지원…"지금 이곳이 천국"

◆새해 셋째 날 풍경

근처 '후아이 뽕' 마을에 술과 카놈(과자)을 사 새해 인사를 간다. 미니 트럭 뒤에 타고 비포장 길을 가는데 마치 파도를 타는 배처럼 요동을 친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가다 보니 허리가 아파 차라리 서서 가는 게 편할 정도이다. 마을 입구에서는 청년들이 모여 다꼬(발배구)를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차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니 그 집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술이 몇 순배씩 돌아가면 어깨춤이 절로 나올 듯하다.

옆방에서는 잔잔한 기타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본다. 몽족들은 보통 1층 땅바닥에서 그대로 생활하는데 깔리양들은 1층은 비워놓고 2층을 얼기설기 막아 산다. 하수구 시설 같은 것은 없고 대나무 바닥에 그대로 설거지 물을 버린다. 세제를 무슨 보약처럼 듬뿍듬뿍 쓰는데, 마치 우리 어머니 세대를 보는 듯하다. 사람들이 모인 이 집 역시 판자로 막아 놓은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그을음이 쌓인 부엌과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사람들의 윤곽만 겨우 드러난다. 부엌 한쪽에는 새해라고 갈비가 쌓여 있다. 손님들에게 내놓은 육회와 삶은 고기는 버펄로라도 되는 듯 무척이나 질기다. 밥과 술이 나오고, 사 가지고 온 홍통 위스키를 역시 술잔 하나에 소다를 타서 돌린다.

옆집으로 가니 근처 맬라로이라는 소도시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키가 큰 16살 소년이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 이방인에게 호기심을 느낀 소녀와 아낙이 해맑게 웃으며 앉아 있다. 장작불 위에서 새카맣게 그을린 주전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소녀가 커피를 타준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은 그새 정자로 옮겼다. 술도 맥주로 바꿔 마시며 화기애애하다.

◆끊이지 않는 소녀들의 춤

학교에서는 오늘도 소녀들이 무대에 올라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눈만 뜨면 만나는 동네 사람들은 모닥불가에서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장사처럼 풍채 좋아 보이는 몽족 사내가 나에게 자기 옷을 입어 보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이 웃음보를 터뜨린다. 그 옷을 입고 무대로 올라가 반주도 없이 우리 노래를 세 곡이나 불렀다. 마을 스피커를 통해서도 나오니 거리를 걷다가 가게에 앉아, 마을 사람들도 배꼽을 잡으리라.

어스름이 내리자 마을 사람이 자기 집에서 밥을 먹자며 데리러 오고, 모였던 사람들이 그곳으로 삼삼오오 몰려간다. 이 집 부엌도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반질반질한데 역시 그을음에 젖은 새카만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밤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학교로 모인다. 옆 깔리양 마을에 산다는 중풍에 걸린 30대 사내가 어눌한 걸음걸이에 술까지 취해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진다. 소녀들이 많이 앉아 있는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아마 바지 앞 지퍼가 내려간 모양이다. 몸이 불편해서인지 목소리만 크다. 노래 중간 옆사람에게 커피를 달라고 하는 등 횡설수설, 실수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잘 받아준다. 다음날은 청년들이 아침부터 깔리양족 마을인 '쿤 맬라노이 오바또'에서 빌려온 행사용품들을 부산하게 챙겨 가져다준다. 이곳에는 '오바또'라는 독특한 구조의 관청이 있어 오지 산마을의 모든 행사용품을 무료로 지원한다. 탁자, 의자, 포장, 가라오케 기구, 취사도구와 그릇들, 마이크 용품까지 완벽하게 빌려준다. 이어 깔리양족과 함께 산기슭에 모여 밥을 먹는다.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어디에도 다른 점이 없다. 그들의 따뜻한 모습에 이방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마저 풀리는 듯하다.

◆노래하는 목사

건넛마을 '후아이 펑 까오 깔리양 마을'의 목사에게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교회에서 예배가 있으니 와서 한국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다. 이 오지에도 마을마다 교회가 있다. 교회에는 어느 곳을 가나 앞에 무대처럼 각종 악기와 볼륨 좋은 대형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방인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며 자고 가라고 하는가 하면, 예배시간에 가끔 노래를 시키기도 한다. 기타를 메고 항상 즐겁게 이끌어 가는 분위기가 참 좋다. 사람들을 기다리며 목사님은 기타를 치고 사모님은 찬송가를 몇 곡 부르는데 마치 부흥회라도 온 듯하다. 목사님의 근엄한 표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설교도 시종 웃으며 한다. 문밖에서는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 깔린 짚더미를 서로에게 씌우며 장난이 한창이다. 천국이 어디 멀리 있는가. 여기 있으니 어서 놀러 오라고 예수님이 손짓하는 듯하다. '處處佛像 事事不恭'(처처불상 사사불공: 가는 곳마다 성전 아닌 것이 없으며, 하는 일마다 성경 아닌 것도 없다).

오토바이 바퀴에 막대기 두 개를 끼워 마치 도롱태처럼 굴리는 아이는 오래 단련된 듯한 솜씨로 잘도 돌린다. 산골 아이들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장난감이다. 2층 부엌으로 올라가니 대나무로 벽과 바닥을 막고 안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다. 벽에는 작은 합판 한 장에 이 나라 알파벳이 쓰여 있는 걸 보니 아마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모양이다. 오후 예배까지 참석하고 돌아가려는데 못내 아쉬운지 사모님이 커다란 당근 2개와 쌀을 싸주고 빡통(호박)도 하나 준다. 마당에는 마을 청년들과 인근 마을 청년들이 섞여 게임당 20바트씩을 걸고 다꼬를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동전 따먹기를 하고 있다. 문득 잊힌 그리움 하나 물방울처럼 떠오른다.

윤재훈(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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