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흔히 '자기 PR 시대'라고 한다. 입 다물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성과를 알리고, 작은 것도 부풀려 홍보해야 뒤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 흐름과 달리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겸손과 소박, 부끄러움을 평생 잃지 않았다. 추기경은 영명 축일을 맞이하는 신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는 직접 축하카드를 써서 보냈으나 1998년부터는 전화를 주로 했다고 전해진다. 전화를 받은 신부들 중에는 '설마 추기경님이 전화를 하셨으랴' 하는 마음에 '네가 추기경이면 나는 교황이다'며 전화를 끊었다가 나중에 진짜 추기경이었음을 알고 곤혹스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자화상 '바보야'
김수환 추기경의 자화상은 동그라미 안에 눈과 코, 입을 간단한 선으로 쓱쓱 그린 것이다. 자화상 아래에는 '바보야'라고 적혀 있다. 평생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을 전파한 추기경은 자화상에 왜 바보라고 적었을까. 세인의 궁금증이 증폭되자 한 기자가 질문했다.
기자, "자화상에 왜 '바보야'라고 쓰셨습니까?"
추기경, "바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저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내 모습은 바보에 가까워요."
바보라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추기경은 "제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그런데 안다고 나대고 있으니 바보지. 그런 식으로 보자면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 하느님은 위대하고 사랑과 진리, 그 자체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나는 바보가 맞아요."
추기경의 이 말씀은 '자신을 바보라고 낮춤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적인 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는 질책이었음을 보여준다.
서울 동성고등학교 총동창회 뉴스레터 2007년 11월 20일 자에 따르면 김 추기경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에 대해 '재주가 모자라서 간단하게 그렸다. 전시회는 상상도 못했고, (그런 걸 염두에 두었다면)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간단하면서 함축미가 있다고들 하는데 부끄러운 심정이다.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다. 생각나는 대로 그렸을 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호평이나 칭찬에 대해 은근슬쩍 물타기 하는 세태와 정반대로 추기경은 '호평'에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 훔쳐 갈 게 없는 방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부자'였다. 교구법인의 모든 재산이 교구장 명의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김수환은 가난했다.
한 번은 추기경이 밤늦게 혜화동 숙소에서 묵주 기도를 하고 있는데 행려자가 불쑥 들어온 적이 있었다. 행려자는 "배가 고파서 왔으니 돈을 달라"고 사정했다. 당시 추기경은 지갑은 물론 방에 단돈 1만 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추기경은 "지금 내게는 돈이 없다.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면 비서 신부한테 갖고 내려가라고 하겠다"며 내려 보냈다. 잠시 후 비서 신부를 불러 돈을 조금 주어서 행려자를 돌려보냈다. 이튿날 주교관 수위실과 비서실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들은 즉시 현관에 번호 키를 설치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추기경은 "무슨 일이 있겠느냐? 내가 시달려도 좋으니 자동 키를 떼라"며 역정을 냈다고 전해진다.
신자들 중에는 성무활동에 쓰라며 추기경에게 돈 봉투를 내미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추기경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도 많았다. 추기경은 이 모든 돈과 선물을 AIDS 환자공동체'외국인노동자공동체'출소자공동체 등에 미사 주례를 하러 갈 때 들고 갔다. 비서실에 문의해 통장에 돈이 있으면 "내가 그 돈을 갖고 뭐하겠느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재촉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쓸 줄을 몰랐고, 워낙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이라 쓸 데도 없었다.
◇ 소박한 일상
김 추기경은 식사준비'세탁물 정리'서류 정리 같은 일상적인 일들을 대부분 비서나 식복사 등 주위 도움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를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거나 '왜 이렇게 해놓았느냐'고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을 가까운 데서 모셨던 사람들은 "사람이라면 불편한 게 없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추기경은 요구를 전혀 안 하셔서 백화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적도 있었다"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 추기경이 경차 티코를 타고 가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다. 자동차 회사가 이 소식을 광고로 활용하다가 신자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휴일에 우연히 발생했다. 그날 추기경은 자신을 방문한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들과 외출하려고 교구청 현관으로 나왔다. 예정에 없던 외출이었고, 당일은 운전기사가 쉬는 날이라 자동차가 없었다.
비서실에서 운전기사를 호출하려고 하자 추기경은 "요한(당시 운전기사)이도 휴일에는 쉬어야지"라며 AFI 회원들이 타고 온 티코 자동차를 타고 나섰다. 자신의 편리를 위해 기사의 휴일을 망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의 초대와 호화로운 식사 초대가 겹칠 경우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초대를 택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추기경의 마음 씀씀이는 타고난 성격이었다. 그는 부자와 명예를 가진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을 무수히 만났지만 진정 기쁘게 만난 사람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었다.
◇ 힘들다고 고백한 사람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을 대표하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사회의 어려운 문제에 맞서 싸웠다. 때로는 사랑과 용기로, 때로는 배려와 엄격함으로, 때로는 권위로 약한 자를 감싸고, 부조리에 맞섰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성자로,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주, 누구나 기대고 싶은 사람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의 수장(首長)'이라는 명예가 무색할 정도로 겸손하고 인간적이었다.
명동성당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1970, 80년대에 추기경은 방문객들과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3층 성당으로 홀로 올라갔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홀로 십자가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은 힘들고 지친 평범한 일상인의 모습이었다. 추기경이 진 무거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추기경은 간혹 "다들 나한테 와서 어렵고 힘든 얘기를 털어놓으며 도와달라고 하는데 난 누구와 상의해야 하나?"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추기경이 도움을 청하거나 상의할 상대는 하느님밖에 없었다. 추기경은 경제적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난 뒤에는 "내가 은행이라면 좋겠다"는 말로 자신의 어려움과 돕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스스로 바보라고 칭했던 추기경의 옹기처럼 소박한 삶은 화려한 것을 지향하는 사회 풍조와 반대로 향하는 것이었고, 순수한 웃음은 거짓과 탐욕을 부끄럽게 만드는 양심의 리더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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