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120주년을 맞아 혁명의 발원지를 둘러보았다. 동학혁명은 1894년 갑오년, 고부 군수의 만석보 수세 징수가 발단이 된 농민항쟁이지만 도시민, 소상인, 몰락 양반 등 사회 여러 계층이 동학세력과 손을 잡고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어서 학계에서는 갑오동학혁명이라고 한다. 혁명군은 관군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웠으나, 항쟁은 실패로 끝났다. 많은 사람이 처형되고, 마을은 불태워졌지만 지금은 근대화운동으로 재조명되어 모의탑이며 전적지도 만들고 무명농민을 위한 추모탑도 세워 항쟁의 뜻을 기리고 있다.
날씨가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청한 날씨에 나는 한 마을을 주목했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주산마을이다. 항쟁의 주모자인 전봉준은 처가가 있는 이 마을의 한 초가집에서 동학의 우두머리 20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만들었다. 한지 위에 사발을 놓고 돌아가며 이름을 서명하여 봉기 모의를 한 것이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이 있었으리라. 무엇이 얼마나 그리 절박했기에 가족의 안위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 모의를 감행해야만 했을까. 동학의 사상이 평등이라지만 생존보다 처자식보다 그것이 우선이었을까.
동학 교주의 면면을 보면 그들이 평등을 최상의 가치로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1대가 최제우요, 2대가 최시형이다. 3대는 독립선언문의 손병희이며,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그의 사위이다. 백범 김구도 동학 교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초대 교주인 최제우는 그의 사상 '인내천'(人乃天)에 의해 집에서 부리던 두 여종의 문서를 불태우고 며느리와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노예 해방 운동이 일어났으니 인간에게 있어 '평등'은 추상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터넷도 SNS도 없었던 시대에 생김도 다르고 말도 다른 동서양의 인간이 같은 고민을 할 수 있었을까.
마을은 초라하고 한적했다. 한때는 만민평등의 표징이 된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사발통이 작성되었던 초가집마저 전 씨도 처가 성도 아닌 타인의 소유로 바뀌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 항쟁의 불씨가 되었던 고부 군수의 자손이 서울에서 내려와 사죄를 했다는데 잘나가는 유명 대학의 교수 신분이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남은 자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으니 그 또한 세상의 인심인가 보았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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