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24)동천동, 서변동 삼국시대 논 유적

제방·보·큰 둑 등 수리시설 한눈에…삼국시대 논 속으로 들어온 듯

북구 동천동에서 발굴된 논 유적은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삼국시대 논 유적 중 하나다.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방 농경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적지에선 특히 보(洑), 제방, 언(堰) 등 시설이 발굴돼 삼국시대 수리시설을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1997년 발굴 당시 현장 모습. 영남문화재연구원 제공
북구 동천동에서 발굴된 논 유적은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삼국시대 논 유적 중 하나다.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방 농경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적지에선 특히 보(洑), 제방, 언(堰) 등 시설이 발굴돼 삼국시대 수리시설을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1997년 발굴 당시 현장 모습. 영남문화재연구원 제공

북위 51도에서 남위 31도. 벼농사가 이루어지는 위도 경계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과 전 세계 35개국이 벼농사 벨트에 포함된다. 세계 인구의 40%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으며 곡물 별 생산량에서도 밀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벼는 음식, 식생활 수단 이상의 개념이다. 우리 세시풍속의 시원(始原)은 대부분 농경과 관련이 있고 전통문화의 상당수가 도작(稻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벼농사는 4천~5천 년 전. 인도의 갠지스강, 인도네시아, 중국 남부에서 동시에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 최초로 벼가 등장한 것은 신석기 무렵. 화분(花粉)이나 탄화미의 고고학적 발굴이 이를 입증한다.

본격 쌀농사의 시작은 청동기시대에 와서다. 광주 신창리, 논산 마전리, 울산 무거동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철기시대 이후 농기구의 발달과 함께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수도작은 인류의 주식량 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벼농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이 논이다. 논은 선사시대 농경의 직접 증거이자 현장인 셈이다. 그럼에도 수전(水田) 유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벼농사 관련 유적이 전국 100여 곳에 이르지만 논 유적은 17곳뿐이다. 그나마 대부분은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대구 동천동, 서변동에서 발굴된 논 유적은 몇 안 되는 삼국시대 논 유적 중 하나다. 호남 충청지역과 비교하면 규모도 작고 출토 유물도 적다. 그러나 영남지방의 농경문화 특징이 잘 나타나있고 삼국시대 수리시설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벼농사 전파 경로는 양쯔강-산둥-랴오둥반도-한반도=한반도에 쌀이 전파된 경로를 해석하는 데에는 중국의 남부로부터 유입되었다는 화남설(華南說)과 중국 중부로부터 유입되었다는 화중설(華中說), 북부로부터 유입되었다는 북방설이 대립한다. 바닷길이 전제되는 화남설과 화중설은 신석기 후반, 청동기시대에 서해를 건널만한 항해술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신뢰성이 떨어진다. 중국 양쯔강 유역과 한반도는 고고학적으로도 연결성이 부족해 이 이론은 설득력이 약하다.

학계에서는 한국 도작(稻作)문화는 양쯔강 회하(淮河)에서 출발해 산둥반도-랴오둥반도를 거쳐 한반도에 전파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경로는 지금까지 한중(韓中) 양국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와도 들어맞는다.

국내 벼농사 유적은 보통 북부지역보다는 한강 이남 특히 충청, 호남, 영남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한대(寒帶)에 가까운 북부지역보다 남쪽지역이 벼농사에 적합한 기후였기 때문이다.

동천동 논 유적은 칠곡 제3지구택지공사 중 흔적이 발견돼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벌인 곳이다. 동천동은 지난 회에서 언급한 대로 대규모 청동기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선사시대 마을 유적으로는 그 중요성이 입증돼 학계 주목을 받았다. 60동이 넘는 대형 거주지, 도랑, 환호, 농경시설이 같이 발견됐고 4개나 발견된 우물은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이다.

◆제방'보'도수관 등 수리시설 발견=동천동 논 유적에서 두드러지는 유적은 수리시설로 제방(물막이 둑), 보, 도수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거천을 가로질러 만든 제방은 하천의 물을 보시설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설로 취수'배수를 위한 구조도 같이 설계되어 있다. 동천동 유적지의 제방은 외형적으로 길이 14m, 너비 3.4m에 이른다. 이 정도 넓이면 우마차 통행이나 보행로로 충분하지만 당시엔 그런 편의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축조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방의 북쪽에는 말뚝을 충분히 박아서 제방의 기초를 보강하고 중앙 구덩이엔 나무틀을 짜고 돌을 쌓아 토사의 유출을 방지했다.

보(湺)시설도 눈길을 끈다. 보는 농경지에 물을 대려고 냇물이나 하천을 막는 소규모 수리시설을 말한다. 일정한 수위(水位)를 유지하려면 수문(水門)이 설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동천동 보의 규모는 지름 4m 깊이 30cm. 북쪽으로 수문을 설치해 물의 드나듦이 가능한 구조다. 보벽(湺壁)은 흡수가 잘되는 점토로 외곽을 시공한 후 말뚝을 5열로 박아 토압에 견디도록 설계했다. 보 남쪽에는 길이 13m 수로를 내 옆의 웅덩이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었다. 보의 물을 논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도랑도 발견되었는데, 도랑의 둑 내부는 말뚝을 박아 지지 효과를 높였다.

◆저수지 한쪽엔 목기제작장 설치=제방, 보, 도랑둑, 논둑 등 수리시설은 편의에 의해 구분했을 뿐 그 경계가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구분이 애매하고 중첩되는 경우도 나타난다.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권태용 연구원은 "시설들의 특징이나 용도가 뚜렷하게 구분된 것은 아니다"고 말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해 유적에 적용했다"고 설명한다.

저수시설과 수로 웅덩이를 연결하는 도수관(導水管) 시설도 흥미롭다. 저수시설과 연결된 가로 6m, 너비 2m 수로 바닥엔 나뭇가지를 촘촘히 박아 하상(河床)의 유실을 방지토록 설계했다.

장축 9.2m, 단축 6.8m, 깊이 1m의 저수시설에서는 목통(木桶)이 발견돼 관심이 쏠렸다. 목통은 저수지 물을 다른 곳으로 유출입시키는 홈통, 홈관의 기능을 하는 시설을 말한다. 지금은 함석이나 PVC로 간단하게 시공할 수 있지만, 당시엔 원목을 '凹'자로 일일이 파내야 하는 작업이었다. 이 저수지에선 목통 외에 V자형 홈 목기, 건축 부재 등이 출토돼 이곳에서 직접 목재 가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웅덩이에서는 밤, 도토리, 복숭아씨 등 과실류와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함께 발견돼 당시 식생활과 관련된 중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마무리하며=선사시대 논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다. 삼국시대 유적인 동천동 논 유적도 마찬가지. 아무리 넓게 잡아도 반 마지기(약 100평)도 되지 않는 규모다.

외관으로만 보면 하천 습지에 여기저기 웅덩이를 파고 보를 막고 물길을 만든 정도다. 그러나 물을 빼고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얼기설기 얽힌 수많은 나무 구조물에 깜짝 놀라게 된다. 하상(河床)을 메운 나뭇가지, 방죽 지지대로 사용된 수백 개의 말뚝, 제방을 둘러싼 목책들은 대략 잡아도 몇 트럭은 될 듯하다.

거대한 토목공사는 아니지만, 당시 고대인들의 수고가 배어 있고 노동의 흔적이 묻어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삼국시대 보(洑)의 흔적이 그대로 출토돼 당시 논의 구조는 물론 수리시설 전반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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