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교육의 몸통이 인문학이다

이젠 교육운동에 몸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상하게 사람들은 왼쪽 날개, 오른쪽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몸통 생각은 안 해요.(중략) 몸통 이야기를 꺼낸 것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가치가 중심 담론으로 자리 잡을 때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강대인의 '교육운동, 진영 논리를 넘어 새 문화의 길로' 중에서)

2006년 9월 1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 전원(121명)이 문과대 설립 60주년을 맞아 '인문학의 위기'를 지적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문학 위기론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아지기보다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말들로 가득한데 대학 안에서의 인문학은 거의 아사(餓死) 직전에 와 있습니다.

한동안 다수 미디어가 인문학 위기론을 다루었습니다. 당시 한 신문은 인문학의 위기는 밖에서 찾아든 것이 아니라 안에 싹튼 것이라고 하면서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이 실종됨에 따라 자기 생각을 글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인문학이 되살아나려면 대학 안에서 글쓰기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문학이 특정 정책의 키워드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2006년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인문학 관계자 내부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었다면 이번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인문학 외부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시끄러웠지만 8년이 지나도록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을 비추어볼 때 갑자기 인문학이 융성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사회 일반은 물론 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의 근본적인 개념이나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입시에 매몰된 초'중등교육에서 인문학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출발의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인문학이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면 어쩌면 인문학은 교육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교육을 하는 이유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고, 생태를 걱정하는 것이 인문학의 출발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생각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민족을 걱정하며, 나아가 세계시민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자는 것이지요.

어쩌면 인문학은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 운동이기도 합니다. 자본에 점령당한 인간의 가치를 다시 되찾자는 것이지요. 자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날개에 있지 않습니다. 몸통에 있습니다. 날개들로 인해 사라져버린 몸통을 되찾자는 것이지요. 몸통이 없는데 날개가 무슨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몸통은 바로 인간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인문학의 본질입니다.

역시 방법은 하나입니다. 미래의 경제를 준비하기 위해 인문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도구론에 매몰될 경우 인문학은 더욱 힘들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제적 효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인 것이지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길입니다. 인문학의 출발은 텍스트에 있습니다. 인문적인 정신은 텍스트를 통한 소통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쓰고, 읽고, 말하고, 듣는 행위 자체가 바로 인문학의 바닥입니다. 바닥을 사랑해야 진정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텍스트를 매개로 한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최근 초'중등교육에도 인문학이 하나의 정책으로 활성화될 것 같습니다. 대학에만 집중해서 지원하던 인문학 관련 정책이 초'중등교육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연히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활동에서 시작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