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가장 실패한 작전으로 신립 장군의 탄금대 배수진을 든다.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은 단 5일 만에 한양을 내주게 된다.
견훤과 왕건의 초기 대결인 공산(公山)전투에서 비슷한 사례와 만나게 된다. 당시에 삼국 패권을 다투던 두 군벌(軍閥)의 세력은 비슷했던 것 같다. 오히려 전투 중에 증원군까지 가세한 왕건이 수적으로 약간 우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왕건은 서너 수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당시 전투 현장은 공산 동수(桐藪), 미리사(美理寺) 앞으로 기록돼 있다. 전문가들은 왕건이 이곳에 진을 칠 때부터 이미 승패가 결정돼 있었다고 말한다. 옛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던 왕건의 군사는 기병(騎兵) 위주 전력으로 짜였다. 그런데 공산 부근은 산속으로 보병 4, 5명이 겨우 드나들 만한 협곡이었다. 고려군은 곽 속에든 칼처럼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의 사기에서도 두 진영의 차이는 확연했다. 당시 후백제군은 신라 왕실을 도륙내고 사기가 충천한 상태였다. 이에 비해 고려군은 송악에서 천 리 길을 달려오느라 전투력이 피로한 상태였다. 적피아타(敵疲我打), 이일대로(以逸待勞) 같은 전략은 견훤을 위한 병법이었던 것이다.
보급선의 문제에서도 고려군은 불리했다. 왕건군이 주둔했던 내동재 부근은 산길이어서 물자의 공급이 쉽지 않았다. 또 동화사 세력과 이미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사찰 세력의 도움도 막혀 있었다. 이에 비해 후백제군은 경주 전투를 치르고 회군하는 길이었으므로 전리품이 풍부했고 보급선이 잘 연결돼 있었다.
이 전투로 왕건은 숱한 일화를 남기고 구사일생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왕건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 후백제에 복수를 하고 신라 경순왕에게 항복문서도 받았다. 그러나 초기 공산 전투의 패착으로 후삼국 통일이 7년 이상 지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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