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26)대구는 후삼국 격전지

왕건과 견훤 신라 공략 제1관문 팔공산서 대회전

후삼국의 맹주를 노리던 견훤과 왕건은 10세기 무렵 팔공산에서 격돌하게 된다. 왕건 군사는 기병(騎兵) 위주로 구성됐음에도 넓은 평원 대신 협곡에 진을 쳐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사진은 봉무토성 근처에서 내려다본 지묘동 왕산 일대로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후삼국의 맹주를 노리던 견훤과 왕건은 10세기 무렵 팔공산에서 격돌하게 된다. 왕건 군사는 기병(騎兵) 위주로 구성됐음에도 넓은 평원 대신 협곡에 진을 쳐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사진은 봉무토성 근처에서 내려다본 지묘동 왕산 일대로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고대 신라와 대구의 관계처럼 미묘한 관계도 드물다. 때론 우방으로, 침략자로 때론 군사적 동맹으로 복잡다단한 관계를 맺어왔다. 일찍부터 국제도시로 성장한 신라는 군사, 문화, 경제적으로 주변 국가를 압도해가며 삼국 통일의 야심을 키워갔다. 신라의 정치, 외교 그 중심엔 항상 대구가 있었다. 고대국가 도약기엔 든든한 우방, 조력자였고 가야와 남부 패권을 다툴 땐 군사적 보루였다.

이렇게 1천 년을 이어간 인연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또 한 번 기연(奇緣)으로 만나게 된다. 후삼국 시대 신라를 두고 고구려와 후백제의 한바탕 격전이 벌어진 대구로 떠나보자.

◆8세기 후반 급격히 몰락…지방 통제력 상실=한반도 동쪽 변방에서 몸을 일으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하대에 이르러 국운이 급격히 기울게 된다. 한때 초승달로 시작해 나라를 일으킨 신라도 만월(滿月)이 된 후엔 '기움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신라의 전제왕권이 정점에 올랐던 시기는 8세기 초 성덕왕대. 780년 혜공왕 피살 이후 왕조는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혜공왕대에서 진성왕에 이르는 132년 동안 왕위 쟁탈전은 23회나 벌어졌고 중앙의 96각간(角干)들은 권력 다툼에 몰두했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국경으로 9주5소경을 두고 전국을 통치하던 신라는 허울뿐인 왕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라 정부는 사실상 지방 통제력을 상실했고 통치 범위는 겨우 경주 인근으로 한정되었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돼버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세력을 키우며 자치의 길로 들어선다. 조세 지체, 부역 기피 등 소극적 저항에 머무르던 호족들의 저항은 얼마 안 돼 무장,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9세기 신라 왕위 쟁탈전에 휩싸인 대구=신라 하대에 이르러 대구는 두 번이나 전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김헌창의 난(822년)과 김우징의 난(838년)이 그것이다.

김헌창은 자신의 부친(김주원)이 무열왕의 직계손이었지만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데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반군은 광주, 전주, 상주에서 크게 기세를 떨쳤는데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구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 양측이 경주를 두고 진군'방어하는 과정에서 대구가 중요한 전략 거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년 후 흥덕왕대에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김우징은 당시 청해진 대사였던 장보고의 병력 지원을 받아 왕경을 향해 진군해 가고 이때 경주에서는 급히 군대를 파견하는데 두 군사가 맞닥뜨린 곳이 또 대구다.

신라 말기에 일부 호족들이 세력을 일으켜 후삼국 시대로 접어든 후 초기에 기선을 잡은 건 후백제였다. 견훤은 호남에서 세력을 일으켜 중원, 경북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합천, 고령, 달성, 대구는 물론 동화사 세력까지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던 견훤은 후삼국의 맹주를 꿈꾸며 경주로 칼끝을 들이댔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경애왕은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두 세력은 운명적으로 대구에서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고려 왕건은 송악에서 군사 1만 명을 급파했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은 신라 궁성을 짓밟아버렸다.

충주 계립령을 넘어 상주, 칠곡을 거쳐 팔공산으로 들어온 왕건의 군사는 대구에서 멈칫하고 만다. 당시 동화사 세력은 물론 대구, 경산지역이 모두 견훤 세력에게 포섭돼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군사를 정비한 견훤은 왕건과의 일전을 위해 팔공산으로 들어온다.

◆공산전투에서 대패한 왕건 겨우 목숨 건져=왕건은 견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동화사 세력을 물리치고 팔공산 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고려군은 후백제와 일전을 위해 능성고개를 넘어 영천 쪽으로 진행했다.

신라 왕실을 도륙하다시피한 견훤도 왕건의 도래(到來) 소식을 접하고 대구 쪽으로 군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두 군대가 마주친 곳은 영천의 태조지(太祖旨). 지금의 은해사 주변으로 추측된다. 양측 정규군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패하고 만다. 신라 왕실까지 접수한 견훤의 기세를 꺾기에 왕건의 1만 군사는 중과부적이었다.

왕건은 동화천을 따라 지묘동 지역으로 퇴각한다. 겨우 한숨을 돌린 고려군은 서변천, 금호강이 합류하는 살내(箭灘'전탄: 화살로 가득찬 내)에서 전열을 고르고 군사를 재정비한다. 때마침 신숭겸이 이끄는 고려의 증원병이 합세하면서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미리사(美理寺'현재 파군재) 앞까지 견훤을 밀어붙였다.

팔공산 미리사 전투는 두 군대가 벌인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왕산 아래서 벌어진 이 전투는 파군재 근처에서 고려군의 대패로 끝났다. 작전의 명백한 작전의 패착이요 전략의 부재였다. 부하 옷으로 변복한 왕건이 겨우 몸을 피했고 신숭겸 장군은 순절했다. 피란길에 오른 왕건은 동촌-안심에서 앞산을 거쳐 당시에 고려에 우호적이었던 성주로 몸을 숨겼다.

◆마무리하며=927년 공산전투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 패권은 후백제로 돌아갔다. 반격에 나선 고려는 930년 안동 병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는 다시 고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신라의 외곽에서 기회를 노리던 후백제는 고려의 기세에 제압돼 서해안 귀퉁이에서 겨우 세력을 유지하다가 934년 홍성 전투에서 패한 후 주도권을 완전히 고려에 내주고 말았다. 경주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신라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歸附)하고 말았다.

수도나 왕경도 아닌 대구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전란에 휩싸인 것은 그만큼 대구가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고려 처지에서는 중원-상주-경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대구는 꼭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후백제 처지에서도 경주의 관문이자 제1의 길목인 대구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런 교통, 군사 거점의 의미 못지않게 각국이 대구를 중시한 이유는 또 있다. 신라 왕실이 팔공산을 오악 중 하나로 여겨 매년 제사를 지냈고, 동화사엔 신라 왕족의 사리탑이 모셔질 만큼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시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삼국 통일로 가는 길, 대구는 경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신라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窓)이었던 것이다.

글 사진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