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수염의 정치적 효용

쿠바가 공산화되자 미국은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해 골몰했다. 미국이 짜낸 방법은 '물리적 제거'뿐만 아니라 '상징적 제거'도 있었다. 제모제로 쓰였던 독극물 탈륨을 카스트로의 신발이나 옷에 뿌려 수염을 없애는 것이었다.(물론 실행되지는 않았다) 미국이 이런 웃지 못할 발상을 하게 된 것은, 미국 기호학자 마셜 블론스키에 따르면 '수염 없는 카스트로의 이미지는 머리털이 없는 삼손'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카스트로의 수염은 미국에 단순한 털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저항' '혁명' '반미'가 응축된 표상(表象)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카스트로가 이를 노리고 수염을 일부러 기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 ABC방송의 바버라 월터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에라 산맥에서 게릴라 활동을 할 때 질레트 면도날이 없어 모두 털북숭이가 된 것이며 그 덕분에 스파이 침투까지도 막을 수 있었다."

그의 정치 감각은 예리했다. 면도날이 없어 기를 수밖에 없었던 수염이 저항과 혁명의 아이콘이 되자 그는 혁명 후에도 수염을 깎지 않았다. 자기 수염의 효용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된 카스트로의 전기 '피델 카스트로-마이 라이프'를 쓴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대담에서 잘 드러난다. "수염은 우리의 신분증인 동시에 보호망이었다. 혁명이 성공하면서 우리는 그 상징을 보존하기 위해 수염을 계속 길렀다."

수염의 정치적 효용을 깨달은 이는 이외에도 많다. 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도 그중 하나다. 그는 2001년 대선 패배 후 수염을 기르고 나타났다. 지나치게 깔끔하고 도회적이어서 정이 안 간다는 세간의 평을 의식한 이미지 개선 퍼포먼스라는 소리가 나왔다.

국내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이런 '수염의 정치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손학규, 박원순, 김한길, 강기갑 등 야권은 물론이고 오세훈, 김무성 등 여권 정치인도 수염 기르기에 동참한 바 있다. 지난 1일에는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수염을 덥수룩이 기른 모습으로 국회 세월호 국정조사특위 기관보고에 출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를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마도 '사죄' '번민' '고뇌' 등이었을 것이다. 이 장관의 수염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에게 얼마나 가슴 깊이 와 닿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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