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 속에서-중국 동포 한국 생활기] 세월이 흘러도 문우 정은 영원하리

고향 문우들이 내일 찾아온다고 전해왔습니다. 국내에서도 잘 이루어지지 못하던 내 소중한 문우들과의 해후가 국외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기연 같네요.

관이와 란이, 고향에서 손때 묻은 소꿉놀이 친구들은 아니어도 같은 시골 동네에서 살았지요. 글쓰기가 인연이 되어 펜팔친구로부터 문학 소모임까지 16, 17년간의 끈끈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촌 지우들, 지금도 그들은 두 번 강산이 바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촌스럽습니다. 강직하고 정직하고 순직하고 우직하고…. 지금 세월에서는 가져서는 안 될 '직'자 돌림들을 아직도 쓰고 있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가지려고 애쓰던 '직' 돌림자를 제쳐놓고 그들은 한국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성품으로 일하여서는 마침내는 환영받는 일꾼도, 이루려는 소망도 조금씩 맞춰나가고 있었습니다.

고향 문학 모임에는 매달 한두 번꼴로 만났습니다. 가난했던 시골 말 그대로 인심이 쌀독에서 나올 때였습니다. 회비고 뭐고 관두고 오늘은 관이네 집에서 다음은 란이네 집에서, 그다음은 봉이네 집에서 모임하면서 그 집 있는 그대로의 독실한 살림 풍경을 보여 주고 맛내기도 했습니다. 누룽지도 와드득 씹어 먹고 잣과 개암, 해바라기씨도 똑깍 까먹고 푹 익힌 줄땅콩 볶음 채와 짭짜름한 감자 채를 안주로 고향 소줏잔들이 댕그랑 명쾌한 울림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푸른 들 개울가에서 혹은 시원한 선들바람 너럭바위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논두렁 머리에서, 장작이 탁탁 소리 불꽃 튕기는 뜨거운 온돌마루에서 우리들이 읊은 자작시와 읽은 수필과 소설들이 사계절을 경유하며 그 얼마였던가요? 그때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지은 시와 '관청 구경을 못해본 촌닭'들이 지은 산문들이었을지 몰라도 낭랑히 산울림도 불러오는 목소리에는 우리들 시선으로 보기에는 참 낭만과 멋이 실려 있었습니다.

란이네 집에서는 귀한 친구들이 왔다고 아껴 키우던 닭 모가지를 비틀었습니다. 저녁 문학 모임 뒤끝엔 술상을 벌이고 물린 뒤엔 트럼프치기도 하고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여자들은 정주에, 남자들은 윗방에 미닫이를 향해 머리들을 향하고 누웠습니다. 피 끓는 젊음들이었지만 시골의 순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도색적인 언사는 한마디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도란도란 할 말이 참 많아서였습니다. 문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미래가 실린 이상에 대해서 끝없이 너 한마디 나 한마디 주고받다 보니 날이 훤히 개었지요.

우리가 자주 모임 가지던 청산리는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을 통쾌하게 쓸어 눕힌 유서 깊은 동리로 관이가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때가 되니 하나 둘 문우들이 가정을 이루었고 관이도 장가들던 날에는 우리 문우들이 쓸어가서 축하해주고 긴 밤을 애먹이던 일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그렇게 문우들이 각자 가족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게 되고 자연 아름다운 시골 문학 풍경도 옛 기차에 태우고 추억동네로 떠났습니다. 문우들이 너도나도 시골에서부터 벌방으로, 연해도시로, 해외로 타향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모임 7인회가 5인회, 3인회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조용히 퀴즈로 남긴 채 문을 닫아 맸습니다.

절반 이상이 한국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두 문우와 2년 전 여름부터 즐거운 상봉이 되었네요. 펜팔친구들이 메신저 친구로, 식탁의 고향 흰 술이 도수 낮은 소주로, 개울가에서 부르던 연변 노래가 노래방에서 부르는 발라드로, 특히나 모임 주제로 되었던 문학이 인생 타령으로 색칠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변신한 듯하면서도 변신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생활로 셈평이 환히 폈지만 질박한 의식이 아직도 그 사람들 심장부의 핵심처럼 빛나고 있는 것에 눈물겹게 고마왔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혹독해도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임에 새삼 놀라웠습니다. 어디서든 어울릴 수밖에 없는 하나같은 의기투합, 그래서 오로지 그 투명하고 소박한 의식이 우리를 끈끈히 묶는 질긴 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무 때 아무 날 어느 누가 거짓이든 위선이든 물든다면 우리 모임에서 찌그러진 모습으로 더는 쳐다볼 수없는 깨끗한 거울처럼 스스로 퇴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렴, 그럼요. 한국에서 해후한 소중한 내 단짝 같은 문우들이 바로 쌀독을 박박 긁어 인심 나오는 산타클로스입니다.

류일복(중국동포 수필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