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리양족 마을의 풍경
붉은색과 밤색 체크무늬가 유난히 선명한 아낙들의 전통 옷과 미혼을 나타내는 소녀들의 옷이 순백의 드레스처럼 예배당을 환하게 밝힌다. 누가 꺾어다 놓았을까, 깔리양 신부님 앞의 들꽃 다발 향기가 가득하고 설교소리만 잔잔하게 창문을 넘어 지상으로 내려간다. 나는 며칠째 코흘리개 아이들 4명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시멘트로 만든 국기게양대 아래 누워있는 아이,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아이, 공부는 영 뒷전이다. 꼬맹이들과 빨간 크리스마스꽃이 양쪽에서 마을을 밝히는 길을 따라 마을 구멍가게에 간다.
버펄로를 몰고 돌아오는 남정네, 대바구니 끈을 머리에 걸치고 가는 아낙, 오토바이 뒤에 아이들을 태우고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땅속 깊이 괭이 날을 박아 귀뚜라미를 잡는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이 오지 산간 마을에서 귀뚜라미는 단백질 섭취에 좋다고 한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아이 하나가 논을 무질러 달려온다. 40~50년 전쯤의 동무 하나, 걸적걸적 신발 소리를 내며 온 그의 발등 위로 동그랗게 흙테가 선명하다. 신작로를 따라 지천으로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길을 따라가는 소녀들의 등 뒤로는 꽃보라가 자욱하고, 소년들의 책보 속에는 달그락달그락 노란 도시락 소리만 요란했던 그 길. 둑길에는 장난꾸러기들이 띄워놓은 종이배만 하염없는 물길을 따라 바다로 향하고 있었지….'
잠깐 어릴 적 고향 마을의 상념 속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하꼬방에 앉아 깔리양족 사람들이 집에서 만든 40도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 어떤 이는 힐끔거리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두어 사람이 내게 다가와 술을 권한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선한 웃음과 몸짓으로 금방 친구가 된다. 하루 종일 수확한 양배추를 미니트럭에 가득 싣고 오늘 밤 인근 도시로 떠나기 위해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몽족들, 수확이 끝난 밭에 남아있던 우수리 배추를 캐오던 소녀들이 내게도 두어 개 주고 간다. 몽족마을로 넘어가는 길가 집에는 사람들이 모여 TV에서 나오는 무에타이 중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승의 마지막 날
마을 사람들이 종일 몽족 언어로 돌아가며 마이크로 경을 읽는다. 원래 없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망자에 대한 축원과 남아있는 가족을 위로하는 노래라고 한다. 기다란 탁자 위에는 삶은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놓여 있고 각자의 앞에는 두 잔의 술과 차들이 있다. 몇 개의 쌀 그릇 가운데에는 계란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한 사람의 독경이 끝나면 두 잔의 술을 마시고 이야기한다. 망자에 대해 추억하며 웃다가 독경은 다음 사람으로 이어진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 25세 솜차이네는 딸 7명 아들 2명이고, 옆에 있는 22세 솜깽은 8형제라고 하니 어느 집이나 자손이 번성하다. 느지막이 도착한 친척들, 여기서 60㎞ 떨어진 매쳄이라는 산속 마을에 산단다. 4시간 비포장 산길을 지그재그로 돌며 헐떡이다 보니 밤이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우기 때는 올 수도 없는 길이라 한다. 그곳에는 몽족, 깔리양족, 르와족 , 란나(콘무앙)족, 타이인들이 섞여 사는데 산속에는 띄엄띄엄 몽족들이 상당수 산다고 한다. 종일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의 농사일이 고되다 보니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방인인 나에게도 권하기에 둘러앉은 밥상에는 돼지 야채국 하나와 밥, 홍통 위스키, 소다 한 병이 전부다. 벽에는 그동안 들어온 부의금의 액수를 표로 만들어 붙여 두었다. 330명 량이 부의금을 냈는데 가장 많이 한 사람이 4천바트(약 16만원)이고 대부분은 100바트 이하이다. 내 이름 옆에도 100자가 선명하다. 7일간 진행되는 행사에 가족들은 아쉽기도, 지치기도 할 듯하다.
◆9마리 소를 잡다
어떤 알 수 없는 인연에 이끌려 이 지상에 왔다가 이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날. 오전 7시가 넘어가자 망자는 이미 떠나고 마지막 미니트럭이 의자를 싣고 떠난다. 10여 분 떨어진 깔람삐(양배추) 밭 한가운데가 장지다. 이 산중에 도요타 미니트럭들이 잔뜩 서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일본은 롤모델이다. 도시를 굴러가는 차들도 대부분 일본산이며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오토바이 역시 일본 3사 제품이다. 동남아 거리 역시 일본 오토바이들이 넘쳐나는데, 그 나라 가구 수와 비슷할 것도 같다. 이른 아침 산속에는 피 냄새가 가득하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10여 명 붙어 손질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앞에는 핏빛 고기와 부산물들이 잔뜩 쌓여 있다. 한쪽에서는 9개의 말뚝이 보이고 그 앞에는 소머리가 뒹굴고 있다. 한쪽에서는 상주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이 가져갈 것도 따로 챙긴다.
아득한 옛날 제천시대 풍경은 어떠했을까, 지금도 이렇게 피 냄새 진동하는데. 섬뜩한 기다란 칼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김이 잔뜩 올라오는 커다란 가마솥에 연신 고기가 들어가고 그 아래 장작불에도 꼬치들이 익는다. 천막 아래에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잔 하나를 돌리며 핏빛 선명한 도마 위에서 고기를 잘라 40도 독한 위스키와 마신다. 늘 이런 풍경을 보는 아이들은 전혀 거부감이 없는 모양이다. 한 사내는 나비 같은 발놀림을 하며 캔(3개의 관으로 부는 악기) 연주에 빠져 있다. 오늘도 관 옆에는 가족들이 빨간색 먼지떨이로 털듯이 하고, 할머니는 화장지로 연신 망자의 입을 닦아낸다. 마지막 날이어서 가족들도 눈물을 보인다. 관 옆에서 지관으로 보이는 몽족 전통옷을 입은 사내가 손에 든 대나무 두 쪽과 컵 안의 고기를 연신 윷을 던지듯 던지며 점괘를 본다. 이어 대나무 통에 밥과 고기를 버린다. 점점 많아진 사람들은 여기저기 쭈그려 앉거나 천막 옆에 앉는다. 독기가 빠지지 않는 국그릇에는 아직 피 냄새가 나며 고기도 상당히 질기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한다. 이 산속에서 돼지 13마리(1마리 7천바트, 28만원 정도), 소 9마리(1마리 1만3천바트, 52만원 정도)를 잡을 정도면 상당히 살 만한 집이다. 자손들이 번성하니 십시일반도 많을 듯하다.
윤재훈(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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