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서

저는 사제로 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만나는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종교생활이 무엇입니까?" 혹은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어옵니다. 이 두 질문은 간단한 질문이지만 실은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묻는 것으로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명쾌하고 확실한 대답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한 질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착하게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이 나약하기에 절대자에게 기대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닙니까?". 예,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언가 모자라는 생활이 아닐는지요.

착하게 살며 선행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착하게 살며 선행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은 아닙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이나 누구나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성과 의지를 지닌 인간이 삶에서 꼭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을 실행하는 것인 선행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착하게 살며 선행을 하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매우 아름답고 좋은 일이지만, 신앙생활의 정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이는 종교적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종교적 계율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계율을 잘 지킨다고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착한 일과 계명을 지킴으로써 복을 받으려는 기복신앙은 자신이 믿는 신(神'하느님)과 흥정을 하는 것이지 결코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을 무시하지 않고, 계율을 가볍게 보지는 않지만, 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넘어 절대자이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어떤 종교를 선택하고, 종교적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선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믿는 신을 찾고 만나려는 행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절대자이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닫고, 자신의 삶과 세상일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믿는 신앙은 개인적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삶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하는 사회적 차원에 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모든 순간에, 삶의 모든 사건에, 삶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 안에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숨결과 손길이 닿아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인 인생에서 지속적이고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순례의 길을 정성어린 기도와 함께 찬찬히 걷는다면 삶 속에 묻혀 있는 그윽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견이 곧 삶의 기쁨이 되며, 이 기쁨에 겨워 세상 안에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투신함으로써 세상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특정인에게 폐쇄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모든 이를 당신에게로 초대합니다. 이 초대에 응답하여 하루 한순간이라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은 삶의 가치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질 때 인간 사회는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국제다문화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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