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년호 특별 기획 '밑줄 쫙~대구역사 유물' 시리즈(2014년 1월 4일~7월 5일)를 끝내면서 전문가 좌담회를 마련했다. 발굴 현장, 학계, 박물관 등 각계 전문가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는 선사시대 대구의 역사'문화적 특징, 한국 고대사에서 대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20여 회 연재로는 대구 고대사를 일별(一別)하는 일이 무리였다는 지적과 함께 딱딱한 고대사를 재미있게 풀어 써 역사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대구 월성동 구석기 유적의 역사적 의의는.
이청규: 월성동 구석기 유적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해줄 정도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유물 전체로는 2만여 점이 넘고 특히 좀돌날, 핵석만 5천여 점이 발굴돼 단순 생활유적이나 석기제작장을 넘어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 '하이테크' 단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함순섭: 유물이 너무 미세해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유적이었다. 통상적인 발굴 방법을 썼다면 거의 모두 매몰 되었을 것이다. 좀돌날 5천여 개를 일일이 표시(marking)하는 등 첨단 고고학적 방법이 모두 동원된 발굴이었다.
-청동기시대 동북아 문화 교류와 대구의 역할은?
이: 청동기시대 토기나 묘제 발굴을 통해서 얻은 자료를 보면 대구는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주요 통로로써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동북지역, 북한 서북부, 충청 송국리 지역, 한강 유역, 남한 서부 유역의 청동기 문화가 대구에서 만나 하나로 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구가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주요 통로이자 허브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철기시대에서 팔달동 유적의 의미는?
박승규: 2000년 팔달동에서 발굴된 초기 철기 유적은 한국 고고학계엔 신선한 충격이었다. 발굴 규모나 유물 수준으로 볼 때 한국 철기 문화의 전범(典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초기 철기 문화를 논할 때 팔달동 유적이 그 기준점이 되고 모든 철기 문화를 해석할 때 그 논거가 되고 있다.
이: 팔달동 유적과 비슷한 시기인 월성동 철기유적도 학계의 주목을 받은 유적이다. 이곳에서 철제단검(短劍)이 출토되었는데 제작 시기가 기원전 2세기까지 소급되고 있다. 이 사실이 맞는다면 한사군 시기에 철기 문화가 들어왔다는 기존 이론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 철기 문화가 전래하기 이전에 대구에서 독자적인 철기 문화가 형성돼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마립간기 대구와 신라의 관계
함: 삼국 초기에도 정치 체제 간에는 지금 이상으로 긴박한 외교, 정치가 펼쳐졌다. 이런 외교적 긴장 속에서 대구가 수동적, 보수적으로 운신한 흔적이 눈에 띈다. 신라 마립간기에 대구는 신라와 가야의 틈새에서 큰 고민 없이 신라의 '짝퉁 금관'에 안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비슷한 처지에 있던 창녕 세력은 신라와 다라국(多羅國) 틈새에서 교묘히 선(線)을 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구가 신라의 위세품에 만족하면서 처세 고민을 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 신라와 대구, 주변 세력의 대외관계.
박: 일반 독자들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신라가 주변 국가들을 압도해갔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4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 경주, 가야, 대구 세력의 힘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에 대구 세력이 우위에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 시기 대구, 경산, 경주 세력의 역학관계를 보면 경산 압독 세력은 일찍부터 경주의 직할 체제로 들어간 느낌이 강하다. 지리적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대구는 신라의 간섭, 영향력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운신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비산동, 내당동을 행정 중심으로, 화원, 문양은 대가야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지역의 고분에선 고급 위세품들이 전역에서 동시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즉 대구의 각 세력에게 위세품을 나눠주며 상호 견제를 통해 대구세력을 드리블해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에 신라가 대구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청동기시대 한일 간 교류 경로와 교역품은
이: 만촌동 동과(銅戈), 비산동 청동기 유물을 통해서 보면 기원전 1세기경 외계(外界) 유물들, 특히 일본 청동기가 대구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는 한일 간에 교역 루트가 연결되었다는 증거다. 대표적인 것이 일식(日式) 방제경, 광형동과(廣形銅戈)다.
함: 고대 기록을 보면 신석기 시대 밀물 때 하구가 창녕까지 형성된 것이 확인된다. 대구 턱밑까지 남해안 세력 또는 일본 배들의 진입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낙동강 루트가 열렸다는 것은 결국 해산물의 유입을 의미한다. 달성 토성에서 발굴된 조개껍데기, 패각이 그 증거다.
박: 봉무동에서 포구마을 흔적이 발굴된 적이 있다. 화원 구라리 일대로 포구가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4, 5세기 무렵엔 정어리 같은 염장 해산물들이 내륙으로 바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달성 예현리 인골에 이름(학명)을 붙이는 일이 가능한가?
박: 인골에 학명을 붙이는 경우는 해당 유물이 고고학적 의미가 있는 획기적 자료에 한한다. 또 고인류에만 한하고 청동기 인골은 해당 사항이 없다. 그러나 창녕의 '송현이'처럼 지역 출토 인골을 의인화해서 지역의 기념물로 만드는 작업은 가능하다.
함: 옛날에는 점토나 석고로 인골 복원이 이루어져 정교성이 떨어졌지만, 요즘은 컴퓨터 그래픽이나 3D기법을 응용해 거의 완벽하게 실물 재현이 가능하다. 대구박물관에서 예현리 인골에 '달성이'나 '예현이' 같은 이름을 붙여 실물로 복원하는 것을 검토해 보겠다.
-비산동 출토 조형안테나 검의 성격
이: 조형안테나 검의 출토지는 대구, 경산, 경주, 포항 등 금호강 유역에 집중된다. 즉 옛 대구를 중심으로 한 진한(辰韓) 지역이다. 대구에서 동검이 3점이나 나온 것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대구가 진한의 중심 세력이었고 이 검들은 당시 정치 엘리트들의 상징물로 쓰였다는 방증이다. 조형 동검은 북방 유목민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고 중국 동북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런 북방문화는 북한 서북부를 거쳐 대구로 바로 들어오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위만(衛滿)조선의 집단 이주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 시베리아 지역에 기원을 둔 조형 동검이 대구를 거쳐 일본 규슈까지 건너간 것이 확인된다. 이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동북아-일본을 잇는 문화벨트에 대구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증거다.
-본 시리즈에서 아쉬운 점은
함: 방송이나 신문, 역사 기획, 다큐물들을 보면 스토리텔링이 강조된 나머지 과장, 허구의 오류에 빠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본 시리즈는 사실(팩트), 사실(史實)이 충분히 담보돼 충분한 기록물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각계 전문가, 특히 발굴 참여자들의 생생한 경험을 지면에 끌어들인 게 인상적이다.
박: 기자의 시각으로 역사물을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학자는 전문지식은 충실하지만 재미있게 펼쳐놓는 기술엔 약하다. 월성동 철제단검, 봉무동 포구유적 같은 굵직한 유적이 빠진 점이 아쉽다.
이: 개념, 접근법, 스토리 면에서 큰 흠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역 역사, 특히 고대사 대중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나 조선에 들어와서도 지역에 재미있는 발굴들이 많다. 앞으로 지면이 허락된다면 근세까지 시리즈를 풀어갔으면 좋겠다.
사회: 긴 시간 토론에 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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