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출동지령이 내려왔다.
"○○구급대 구급출동! 위치는 ○○동 ○○미용실 앞. 골목길에 쓰러진 할머니 있다고 합니다! ○○구급대, 신속히 구급출동하세요!"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현장으로 가는 도중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상황실에 무전을 했다. 상황실 근무자는 우리 팀원들에게 "지나가는 행인의 신고로 현재 환자의 의식 유무와 호흡 여부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다행히 할머니가 쓰러져 있다는 ○○미용실 앞 골목길에 도착하니 저 멀리서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대략 80세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껴안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난 할머니에게 "할머니, 119입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비가 오는데 여기 계시면 감기 듭니다. 집이 어디세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여기가 어디야?"라고 되물으셨다. 난 속으로 '이 동네 분이 아니신가'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얼굴을 천천히 봤는데 이마 쪽에 넘어져서 다친 상처가 있었다. 구급가방에서 소독약, 거즈 등을 꺼내서 할머니 이마를 소독해 드리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연고로 마무리한 뒤 혈압과 맥박을 체크했다. 다행히 할머니는 크게 다치거나 아픈 데는 없어 보였다. 난 할머니에게 "병원에 같이 가시죠"라고 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병원에는 안 가겠다며 갑자기 집을 찾아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집은 경북 어디인데 어제 딸 집에 왔다가 오늘 딸과 같이 시장에 갔는데 딸이 나를 놔두고 먼저 가버렸다"고 했다. 난 할머니에게 따님 집이 어디냐고 집 주소를 아시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집 주소는 모르고 어떤 아파트 앞에 언덕길이 있고 길옆에는 텃밭이 있다. 그 텃밭 옆이 내 딸 집이다" 고 말씀하셨다.
답답함이 밀려왔다. 할머니 따님 집을 찾아 드리고 싶은데 할머니 얘기로는 전혀 어딘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난 할머니에게 "혹시 집주변에 큰 건물이나 뭐 특이하게 생각나는 게 없으세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그 텃밭에 나무가 있는데 빨간 꽃이 피어 있다"고 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내가 자주 출동을 나가던 한 아파트가 생각났다. 할머니가 말한 텃밭은 아마 그 아파트 가는 길에 보이는 조그만 텃밭인 것 같았다. 난 할머니에게 그쪽 주변으로 모시고 가면 혹시 따님 집을 찾을 수 있는지 물었고 할머니는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마침 그 아파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내 동료는 우리가 평상시 출동 나가던 그 길로 차량을 운전하고 언덕배기에 다다라 잠시 구급차를 멈췄다. 난 할머니에게 "할머니 밖에 한번 보세요. 여기가 맞아요?"라고 말하며 창문을 열어 밖을 보여 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맞다면서 구급차에서 내리려고 하셨다.
할머니를 부축해 차에서 내리자 할머니는 텃밭 옆 골목길로 나를 안내했다. 골목길에서 한참을 들어가다 집 안 불이 다 꺼져 있는 한 주택에 할머니가 멈춰 섰다. '집에 불이 다 꺼져 있는 걸 보니 가족들도 할머니를 찾아 나섰겠구나'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갑자기 지팡이로 창문을 두드리시며 따님 이름을 조용히 부르셨다. 창문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시 한 번 조용히 창문을 두드리시며 따님 이름을 부르셨다. 그때 창문 너머로 "누구요?"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아주머니에게 "119인데 할머니 보호자분 맞으세요? 할머니 모셔 왔으니 대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했다. 잠시 뒤 대문이 열리며 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아주머니는 나오자마자 할머니에게 시큰둥한 말투로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동네 창피하게!"라며 할머니를 구박했다. 난 아주머니를 말리면서 "할머니가 길을 잃어버리셔서 한참을 헤매다 넘어지시면서 이마 쪽에 찰과상을 입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말 대신 "됐으니 가보세요"라고 하면서 할머니를 향해 들어가라고 또 큰소리를 쳤다.
난 그 아주머니가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왜 할머니에게 화를 내세요! 같이 모시고 시장에 가셨다가 할머니를 그렇게 놔두고 집에 혼자 오는 게 어딨습니까!"라고 말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말하는 아주머니 입에서 소주 냄새가 심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집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때 딸이라고 하는 그 아주머니는 집에서 혼자 저녁식사에 술을 마신 듯했다. 이 아주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집을 못 찾고 헤매고 계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저녁밥에 술을 마시고 할머니를 찾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난 것이다. 아주머니는 미안한 목소리로 "3남매에 오빠 둘이 있는데 둘 다 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고 해서 현재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나도 살림 형편이 좋지 않아 힘들다"며 한풀이를 늘어놓았다. 난 "그래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님인데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할머님을 잘 모셔달라고 부탁드리고 뒤돌아 나왔다. 지금도 그 할머니의 작고 초라해 보이던 굽은 등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할머니는 작고 굽은 등에 자식들을 잘 키우려 큰 짐을 짊어지고 사셨는데 왜 그 아들들과 딸은 모를까? 이번 출동 때문에 멀리 계시는 부모님이 많이 생각났다.
양준호 대구 중부소방서 119구급대 소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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