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도 시인도 아닌 것이 화가들이 물감이나 붓을 담아 다니던 화구박스에다 시집과 원고지를 넣어 다니며 분위기 잡던 스무 살 무렵의 쑥스러운 추억이 있다.
몇 년 주기로 한 번씩 당시의 어색한 그 장면이 생각날 때면 어김없이 내 피부는 닭살이 된다.
화구박스를 그냥 그렇게 폼으로 들고 다녔는데, 그래도 남들 보기에는 속과 다르게 제법 그럴싸한 멋으로 보였던지 간간이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건축한다는 나더러 당시 뭔가 예사롭지 않더니 역시 갈 길을 잘 갔단다.
모양새만 보면 그게 그렇게 쑥스러울 일은 아닌데 아마 시인과 화가들에 대한 동경으로 겉멋만 부리다 속내를 들킨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한 번씩 그때를 생각하면 혼자 얼굴이 붉어진다.
클럽 무랑루즈의 포스터 작업을 통해 댄서들의 삶을 묘사했던 꼽추 화가 '로트렉'이나, 어두운 삶의 비애를 시(詩)로 절규했던 '보들레르'에 빠져 몽롱한 술기운과 함께 보내던 갓 스무 살 초반, 괴이한 예술가들의 평탄치 못했던 일생과 정신세계가 당시 극도로 민감한 내 감성에 멋있고 두툼한 삶의 매력쯤으로 와 닿았던 모양이다.
"건축은 가장 총체적 종합예술이다"라는 건축가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초대학장 취임사 한 구절에서 인생의 돌파구를 찾은 듯 환호했고, 건축은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물성의 소재와 건축가들의 광범위한 해석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니 건축이야말로 총체적 종합예술이자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거룩한 일이고 멋있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감흥이 마치 계시처럼 와 닿았다.
물질과 정신의 상호 활발한 운동과 교류에 따른 그 현상적 융합의 틀이 건축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렇다면 인간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행복 DNA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가 건축가들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건축 작업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나는 건축을 동경하고 있다.
조금은 심각하고 무거운 감성 탓인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축작업 역시 두텁고 무겁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갤러리 & 다이닝 '누오보'의 건축 또한 예외는 아닌 듯 물성 자체가 솔리드한 두 가지 재료(이페 원목과 송판 무늬의 노출콘크리트)들이 시간의 흐름을 통해, 세월이 만들어 주는 흔적과 절제된 조형 비례가 주는 안정감이 조금은 무겁고 과묵하게 조화를 이룬다.
도시의 경계를 막 벗어나는 대구의 월드컵 경기장 가로변에 도로보다 5, 6m 정도 낮은 기존 마을 언저리에 위치한 '누오보'는 도로변에서 보는 전경이 좋다.
1층 갤러리, 2'3층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구성돼 있으며 현대적 조형이긴 하지만 솔리드한 재료가 주는 친화성과 과묵한 안정감이 주변과 좋은 컨텍스트를 이루고 있다.
상업건축물의 인지를 위한 이해가 전제되더라도 마을에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도로변의 존재감을 위해 부득이 3층으로 계획하다 보니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우두커니 서 있는 낯선 이방인이 마을을 외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NUOVO'는 영어 NEW의 이탈리아어다. 새로운 문화와 음식을 지향한다는 갤러리와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콘텐츠 이미지를 함축시킨 단어이며, 디자인 콘셉트는 VOID & SOLID '비움과 채움'이다. 이 건축에 무엇이 꼭 필요하고 불필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긴 시간 여유 있게 고민했었던 기억이 좋다.
글'사진: 이용민 PAN건축조형연구소 소장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