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앉아서 후박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하염없이 듣는다. 빗소리는 왜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적막을 자꾸만 들어붓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옛날이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옛 친구처럼 늘 곁에 들러붙어 있는 묵은 라디오에서 채은옥의 '빗물'이 쓸쓸히 흘러나온다.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날이 생각이 나네/ 옷깃을 세워주면서 우산을 받쳐준 사람/ 오늘도 잊지 못하고 빗속을 혼자서 가네~.' 이토록 절절하게 빗물이 전파를 타고 흘러내린다. '빗물' 가사 중에 '옷깃을 세워주면서 우산을 받쳐준 사람.' 아, 이 대목이 압권이다. 사랑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비 내리는 오후, 흘러간 추억의 가요가 그 옛날을 고요히 불러와서는 심금을 그만 울려놓고 만다. 찾아보니, 비를 주제로 한 곡이 조영남의 '빗속의 여인'을 비롯하여 무수히도 많지만 허스키한 짙은 음색으로 부른 채은옥의 '빗물'은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시(詩)며 너무나 아프게 다가온다.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돌아보면은 아무도 없고/ 쓸쓸하게 내리는 빗물, 빗물~'. 옷깃을 세워주며 우산을 받쳐주던 그 사람이 그리워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쓸쓸한 빗줄기만 뒤따라온다는 표현을 연속 두 번 반복함으로써 사랑과 이별의 아쉬움을 배로 증가시키고 있다. 참으로 절창이란 생각이 든다. 노래뿐인가, 찾아보니, 비의 종류도 한 스무 개나 된다. 그중 입맛 쭉 당기는 '술비'라고 있는데 술꾼들은 자신 안에 감춰진 슬픔들을 불러내는 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슬픔에 몸을 맡긴다고 한다. 그야말로 오락가락, 주막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수상하기도 한 술비 앞에서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더 많았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하기도 한다.
특히 여름날의 빗소리는 말라버린 마음의 정서를 촉촉이 적시며 흐른다. 빗소리에는 사유의 미립자들이 숨어져 있는지 생각이 생각을 가지치기도 하고 지난날의 추억을 되돌아보게도 하는데 이런 날, 비에 관한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의 그 어떤 탁류도 투명한 저 빗소리에 씻겨 내려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상의 저 비는 왠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비(慈悲)로 가슴에 와 닿는다.
불현듯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흙냄새와 함께 풀풀 되살아난다. 풀꽃처럼 풋풋한 한 소년과 소녀의 설렘이 너무나 짧게 그치고 만, 한여름날의 소나기와도 같아 더욱더 애잔한 감동이었던 영화, 그 '소나기' 속에 파묻혀 있을 동안은 자신이 마치 비에 흠뻑 젖어 푸른 수숫대 같은 한 소년 앞에서, 젖은 블라우스를 부끄럽게 말리고 있는 싱그러운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박숙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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