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 저급한 경제주의를 넘어

성장지상주의 혹은 수출입국론의 깃발을 따라 생명까지 바칠 각오로 살아온 사람은 '저급한 경제주의'란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감을 느낄지 모르겠다. 그것도 제도권 경제학자가 공적 담론의 장인 신문 지면에 저급한 경제주의라고 대놓고 말하다니 뭇매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내지른다면 대구 경제가 지금 이 상태, 이 지경이 된 것에는 저급한 경제주의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쯤 되면 어디선가 누군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겠다. "좋소. 당신의 말이 맞다고 칩시다. 그런데 도대체 방점이 어디에 놓여 있는 것이요? 저급한 것이 문제요, 아니면 경제주의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거요?"

아무렇게나 말을 막 내뱉다가도 이러한 송곳 같은 질문을 받게 되면 엉터리 제도권 학자가 통상 그렇듯이 꼬리를 슬쩍 내리고 얼버무리며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건 생각하기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달리 생각할 경우 반드시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새 대구시장이 뽑혔다. 변화와 혁신을 외치는 5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시장이다. 젊은 시장에 대해 이런저런 기대가 있는 모양이다. 친구와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말이다.

"이전의 대구시장은 TK에게 말 잘 듣는 막냇동생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어" "무슨 말이야?" "할 말 있으면 따로 불러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말 안 들으면 불호령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시장으로 뽑아놓은 것이지" "모시는 형님들에게는 어여쁜 막냇동생이지만, 공무원이나 시민에게는 막내 삼촌으로서 군기를 잡는 그런 시장" "그런데 새로 뽑힌 권 시장을 그들은 여전히 막냇동생으로 인정해줄까?"

이야기는 더 이어졌지만 취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가 바로 그 뒤를 이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얼핏 생각나는 것은 그들에게 막냇동생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던 이전의 시장과 달리 새로 뽑힌 대구시장은 품 넓은 맏형의 노릇을 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소주잔 속에서 오갔던 것 같다. 이른바 '맏형론'이 술판의 안줏거리로 등장하고 우리는 어느새 만취 상태에 빠졌다. 맏형의 등장은 막냇동생의 전성기 시대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맏형의 등장은 무엇보다 지역 사회에 있어 리더십의 교체를 의미한다. 그들의 막냇동생은 그들의 지시를 신줏단지처럼 받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맏형은 태생적으로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신의 탄탄한 입지가 확보된다. 이러한 점에서 새 시장을 그들이 막냇동생으로 인정해줄까라는 질문은 그야말로 불온의 극단에 다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세대에 근거한 맏형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슈의 하나는 지역에 청년을 안착시키는 문제다. 이는 맏형론의 출발점이자 자기 정체성의 근거다.

우리가 맏형론에 희망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맏형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세대 간 희생의 교대가 불가피하다. 과거의 세대에게 미래의 세대를 위해 이제 희생의 교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승복하도록 하고 이를 요구하는 것이 맏형의 숙명이다.

맏형의 리더십은 이러한 숙명에 대해 헌신할 때 생겨난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이러한 단절에 근거하여 연속된다.

연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오히려 그 단어는 창조라는 단어로 바꾸어 쓸 때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창조라는 단어를 이렇게 슬그머니 꺼내 드는 것은 새로운 대구시장이 대구를 '창조경제 수도'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창조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사람은 빌 게이츠다. 그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외치며 다니고 있다. 그가 꿈꾸는 세계는 인본주의적 자본주의다. 돈이 모든 것의 바탕(本)이라는 자본주의와, 사람이 돈을 대체하여 그 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인본주의는 빌 게이츠에 의해 가장 역설적으로 그러나 가장 숭고한 방식으로 융합한다. 창조는 역설을 통해 오로지 가능하다. 대구의 창조경제는 저급한 경제주의에 대응하고 바꾸는 데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김영철/계명대 교수·경제금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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