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TV도 흔치 않았던 때, 아이들의 놀거리는 대개 비석치기나 올캐바닥, 딱지와 구슬치기, 땅따먹기 같은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최고 인기는 만화였다. 어렵게 받은 5원, 10원의 용돈으로 눈깔사탕을 사먹을까, 만화방으로 갈까를 고민하지 않았던 아이는 아마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봤던 만화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김민의 '불나비'였다. 이제 생각해도 이해가 쉽지 않은 '구도'(求道)가 주제였지만 이 만화를 끝까지 보고 난 뒤의 느낌은 유명한 명작 소설을 한 편 본 듯한 뿌듯함이었다.
불나비는 천하제일 검객이었다. 그는 수많은 싸움 끝에 그 자리에 올랐지만, 어느 한순간 회의와 절망을 느끼고 검의 도(道)에 매달린다. 이때쯤 그에게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검객'이라는 수식어가 달린다. 불나비가 한 고승(高僧)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불도(佛道)와 검도(劍道)를 묻는 그에게 스님은 나무 한 그루가 그려진 족자를 주며 베어보라고 말한다. 불나비는 검을 빼들고 오랫동안 족자 앞에 서 있었지만 결국 베지 못한다. 스님이 왜 족자 하나도 못 베냐고 묻자 그는 족자 안에 그려진 나무(매화로 기억하는 데 소나무였으면 더 좋을 뻔했다)에서 나무가 살아 온 천 년의 세월을 보았다고 했다. 그 천 년의 세월이라는 무게감 때문에 도저히 벨 수가 없었다고 했다.
유명 사진작가가 산림보호구역에 무단으로 들어간 것도 모자라 사진 찍는데 방해가 된다며 수십 그루의 나무를 잘라냈다가 벌금형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는 울진국유림의 대왕송을 찍으려고 주변에 있던 25그루를 무단 벌목했는데, 그 가운데는 수령이 220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송도 있었다 한다. 그는 이렇게 찍은 대왕송 사진으로 대구와 서울, 프랑스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사진은 한 점당 수백만 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아마 이 작가는 수십 그루의 나무가 무참하게 잘려나가는 현장에서도 오로지 카메라 렌즈 속의 대왕송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불법과 몰염치는 훗날 후배에게 들려줄 영웅담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족자의 그림도 아닌 실물 앞에서도 금강송이 살았던 220년의 세월을 보지 못한 그는, 이제 더는 작가가 아니라 초라한 범법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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