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어떤 시위- 공광규(1960~ )

종이를 주는 대로 받아먹던 전송기기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전원을 껐다가 켜도

도대체 종이를 받아먹지 않는다

사무기기 수리소에 전화를 해 놓고

덮개를 열어보니

관상용 사철나무 잎 한장이

롤러 사이에 끼어 있다

청소 아줌마가 나무를 옮기면서

잎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나보다

아니다

석유 냄새 나는 문장만 보내지 말고

푸른 잎도 한장쯤 보내보라는

전송기기의 침묵시위일지도 모른다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3.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위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그 갈등이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을 때 약자는 강자를 향해 시위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뱀 보듯 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조합에서 시위를 하거나 파업을 하면 언제나 언론에서는 그 앞에 불법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그러니까 시위는 나쁘다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인이 늘 종이만 주니까 팩스도 화가 나서 나도 푸른 나뭇잎을 먹고 싶다고 주인을 향해 입을 닫고 침묵시위를 한다는 것이다.

팩스도 시위를 하는 사회에 살고 싶지 않은가?

권서각 시인 kweon5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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