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자리돔 물회

물회 고수들은 맹물에 날된장을 푼 물회를 즐긴다. 하수들은 잘게 썬 회에 초고추장 친 것을 밥과 함께 비벼 먹으며 그걸 물회라고 한다. 중급수들은 식당에서 끼얹어 주는 초고추장을 싫어한다. 회를 고추장에 잘 비벼 찬물을 부어 마시거나 먹기도 한다.

물회를 먹을 땐 뜨거운 밥보다 식은 밥 한술을 말아 먹어야 회의 질감을 다치지 않는다. 거기에다 붉은 고추를 찧어 담근 '붉그딕딕한' 열무김치를 얹어 먹으면 감칠맛이 한결 더 하다. 하수들은 통상 보온통에서 끄집어내 주는 뜨거운 밥에 이의 달지 못하고 만족해 버린다. 그래서 영원한 하수로 머문다.

경상도 중에서도 포항, 후포, 울진이 물회의 고장이지만 일부 뱃사람들을 제외하곤 물회 고수를 만난 적이 없다. 어부들이 출어하기 전후에 해장을 위해 먹는 물회는 주로 고추장을 푼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뱃일을 오래 한 어로장 또는 선장급들은 고추장 대신 날된장을 푼 물회를 즐기는 모습을 더러 보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들로부터 물회를 배웠지만 아직 완전한 고수가 되진 못하고 있다.

경상도 물회의 재료는 도다리, 오징어, 쥐치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제주도는 유채꽃이 노란 바다로 출렁이고 청보리가 살랑 바람에 온몸을 뒤흔드는 5월이 오면 밥상과 술상에는 자리돔 물회가 홍수를 이룬다. 제주 사람 모두가 물회의 고수들로 날된장을 푼 자리돔 물회를 두 그릇도 거뜬하게 비워낸다. 그것도 모자라 강회, 무침, 조림, 구이는 물론 지난해 담근 잘 익은 자리젓까지 합세하면 다른 반찬은 낄 틈이 없다.

제주도 자리돔은 모슬포 앞바다에서 잡히는 것과 서귀포 보목리 앞바다인 지귀섬 인근에서 잡히는 것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가파도와 마라도 해협은 물살이 센 곳이어서 이곳 자리돔은 씨알이 굵고 가시가 강해 구이와 조림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렇다고 물회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보목리 자리돔은 민물의 붕어 새끼처럼 작고 뼈가 부드러워 물회 재료로는 정말 딱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모슬포와 보목항 주변에는 자리돔 파시가 열린다. 더욱이 이와 때를 맞춰 가파도에선 청보리 축제가 열리고 보목항에선 자리돔 축제를 열기 때문에 육지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온다.

이 기간 동안에 가만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사람은 정작 제주 사람들이다. 정오 무렵에 '바께스' 하나만 들고 자리돔잡이 배들이 들어오는 항구 쪽으로 만원만 들고 나가도 네댓 사람이 실컷 먹고도 남을 자리돔을 퍼 담아 올 수 있다. 그래서 이웃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 돗자리 하나에 도마와 물통을 들고 부둣가로 나오는 풍경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그뿐만 아니다.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는 속담처럼 요즘은 올레꾼들까지 합세하고 있다. 그들도 걷기를 마치면 바비큐 파티를 벌인다며 삼삼오오 떼를 지어 자리돔을 사 가고 있다. 또 즉석에서 자리돔을 잡아 바로 옆자리에서 소주를 마실 수도 있어 아주 싼 값에 제주의 초여름을 한껏 즐길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의 자리돔 사랑은 각별하다. 어부들은 어망으로 건져 올린 자리돔을 물칸에 가득 싣고 돌아오면서 살아있는 자리돔 대가리를 고추장에 찍어 꾹꾹 씹어 삼킨다. 이때 대가리부터 입속으로 밀어 넣어야지 꼬리부터 넣으면 걸려서 먹지 못한다. 자리돔의 지느러미와 꼬리가 바로 비아그라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뱃사람들은 자리돔 물회 맛을 '배지근하다'고 표현한다. 이 말은 '듬직하고 풍성한 게 정말 먹을 만하다'는 표현이다. 또 자리젓갈의 맛은 '코시롱한 냄새가 입맛을 당긴다'고 설명한다. 코시롱이란 제주 사투리는 맛이나 냄새가 비위에 맞는 것을 이른다. 제주 방언 속에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음식에 대한 사랑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제주 여행의 첫날 점심을 모슬포 자리돔 전문집에서 먹기로 했다. 한두 번 가본 적이 있는 항구식당은 내부수리 중이어서 옆집인 부두식당(064-794-1223)으로 밀고 들어갔다. 평일인데도 올레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벼르고 벼른 자리돔 물회를 만났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는 않았다. 이곳 모슬포 쪽 자리돔은 뼈가 세서 그런지 몰라도 물회 재료로선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도반 네 사람이 다행스럽게도 맛보기 삼아 물회는 한 그릇만 시킨 게 정말 다행이었다. 대신에 자리돔 구이를 안주로 술도 먹고 밥도 먹었다. 이제 할 일은 놀멍 쉬멍 걷는 일밖에 없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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