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의 춤, 살사(Salsa). 살사를 추러 가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기자의 살사 체험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은 "각오해라. 파트너와 숨까지 공유한다" "신체적 접촉이 많다"는 등 갖은 이야기로 겁을 줬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살사를 배워보겠느냐'라는 긍정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이미 섭외해둔 살사 수업을 취소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화장도 걱정이었다. 보라색 아이섀도로 스모키 화장을 해볼까 잠시 고민했다가 판다가 될 것 같아서 참았다. 의상도 문제였다. 살사 스승님은 "편한 옷을 입고 오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편한 옷이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에 '살사 의상'을 검색하자 속이 비칠 듯 말 듯한 관능적인 옷과 온몸에 꽃 수술이 달린 것처럼 생긴 난해한 옷만 나오는 바람에 머리가 더 하얘졌다. 수많은 고민을 뒤로 한 채 선택한 의상은 청바지와 면 티셔츠. 입었을 때 가장 편한 옷으로 입었다. 이렇게 살사 수업은 시작됐다.
◆춤을 글로 배운 여자, 살사를 추다
15일 오후 8시 대구 중구의 살사 클럽인 '보니따'(Bonita). 화려한 의상을 입은 댄서들을 상상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맞다. 그건 무대 의상이지 연습복이 아니다. 왕초보 주제에 인터넷에서 발견한 댄서 의상을 입고 이곳에 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청바지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 오후 8시 수업은 살사 중급반으로 20, 30대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퇴근 뒤 곧장 이곳으로 왔는지 정장 차림의 여성 한 명은 가방에서 살사 전용 신발인 하이힐을 꺼내 갈아신었다.
먼저 살사가 어떤 춤인지 기본 개념부터 이해해야 했다. 네이버 살사 동호회인 '살사홀릭' 총책임자인 양한기 씨에게 살사를 출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물었다. "리듬감이에요.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박자를 모르는 사람은 좋은 가수가 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집니다. 푸에르토리코 음악은 한국인에게 생소할 수 있지만, 이 낯선 음악에 익숙해져 박자를 맞출 수 있어야 해요."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 출발한 소셜 댄스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등 중남미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살사를 이렇게 정의했다. 춤에 녹아 있는 것은 중남미인들의 삶이다. 이들에게 살사는 마을 잔치나 결혼식은 물론 농사일을 하다가도 남녀가 손을 맞잡고 몸을 흔드는 대중적인 춤이다. 하지만 살사를 접해보지 않은 이들은 '스킨십이 많은 부담스러운 춤'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도 한다. 여기에 양 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수영을 배울 때도 스킨십이 많지 않나요? 사람들은 수영을 배울 때는 이것 때문에 겁먹지 않는데 살사는 좀 더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살사는 건전하고 여성을 배려하는 춤이에요."
양 씨의 설명처럼 살사는 여자가 대접받는 춤이다. 상대가 춤을 요청했을 때 '거절할 권리'는 여자에게만 주어진다. 양 씨는 "춤추다가 여자들이 구두굽으로 발을 밟아도 남자는 안 아픈 척하면서 계속 춤을 이어가는 것이 매너"라고 귀띔했다. 그만큼 살사에서 '남자의 역할'이 크다. 살사는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가 따라가는 춤이다. 살사를 처음 배울 때 여자보다 남자가 더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걸음마부터 차근차근
살사 '왕초보반'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 교육을 받았다. 기본기를 가르쳐준 이날의 스승은 박나훈(34) 씨였다. "먼저 베이식 스텝부터 배워볼까요?" 살사는 8박자 리듬을 기본으로 하는데 여자는 스텝을 밟을 때 무조건 오른발부터 시작한다. 박 씨는 "베이식은 걸음마라고 보면 된다. 스텝만 밟아도 춤이 저절로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원, 투, 쓰리, 쉬고, 파이브, 식스, 세븐. 앞으로 세 번, 뒤로 세 번 스텝을 밟아야 했다. 기자는 세상의 수많은 몸치 중 한 명이다. 스승님은 "걸음을 걷는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하라"고 말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점점 스텝이 엉키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처음이니까 괜찮다"고 위로를 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은 살사를 금방 배운 뒤 시시하다고 그만두기도 해요. 그래서 살사 전문 댄서들을 보면 노력파가 많습니다." 스승님이 계속 격려했다.
살사는 약속된 춤이 아니라 남녀가 함께 만들어가는 춤이다. '소셜 댄스'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살사의 특징 때문이다. 남자가 신호를 보내면 여자가 신호를 재빨리 알아채고 따라가는 식이다. 그 신호는 '손끝'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 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는 손끝으로 여자에게 신호를 줘요. 남자가 밀면 가고, 당기면 오고, 이렇게 신호를 따라가야 해요." 나는 선생님이 신호를 주지도 않았는데 혼자 '턴'을 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스텝을 밟는 것보다 빙글빙글 도는 게 재밌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자는 어떻게 턴을 하나요?" 내가 스승님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스승님은 "남자는 스스로 알아서 돌아야 한다. 여자는 신호를 줄 필요가 없다"고 웃었다.
◆'숨을 공유한다'던 그 말이 맞았다
오후 9시, 드디어 살사 왕초보반 수업이 시작됐다. 스승님은 기자를 수업으로 밀어 넣은 뒤 유유히 사라지셨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에는 없었던 남녀 수강생 30여 명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여자 선생님은 베이식 스텝을 밟으며 "우아하게, 허리를 펴라"고 강조했다. 선생님의 몸놀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곳 잃은 내 손과 달리 선생님의 손은 리듬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선생님의 스텝과 손짓은 우아했지만 나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래도 베이직 스텝을 미리 배운 덕에 그럭저럭 따라갔다. 복병은 '턴'이었다. 근육질의 왕초보반 남자 선생님은 피트니스클럽 트레이너처럼 박력이 넘쳤다. "턴!!" 이 소리에 맞춰 잘 돌고 싶었는데 발이 계속 꼬였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엉망으로 턴을 하다가 결국 걸렸다. "마지막에 턴할 때 발을 움직이면 안 돼요." 나는 내 발이 움직이고 있는지 몰랐다. "안 움직였어요. 선생님." 선생님의 지적을 받고 다시 턴을 했는데 내 머리의 '신호'를 무시하고 한 발이 혼자 돌고 있었다.
이제 남녀가 짝을 지어 춤을 출 타이밍이 왔다. 살사를 완성하는 것은 간격이다. 두 선생님은 "발을 밟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가까이 서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좋은 여자 파트너가 아니었다. 함께 춤을 추는 남자 파트너들은 하나같이 "팔에 힘을 빼세요"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한 파트너는 자꾸 "가까이 다가오라"고 채근했다. 나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당신의 배가 너무 많이 나와서 가까이 다가가면 닿을 것 같아요'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직 '숨을 공유할' 준비가 안 됐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처음 본 파트너와 눈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상대의 눈을 고혹적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내 시선은 자꾸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두 시간이 훌쩍 흘렀다. 살사가 두렵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집에 가는 길에도 내 발은 베이식 스텝을 밟고 있었다. 몸을 들썩이게 하는 라틴 음악도 좋았다. 이곳이 대구가 아니라 푸에르토리코였으면 좋았을 것을. 나중에 중남미에 가면 그곳에서 꼭 살사를 춰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살사를 배워야 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사진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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