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로 건너야 하회마을 아이니껴. 아니면 딴 길이지."
그를 만난 건 수년 전 말 많던 4대강 사업이 막 시작될 때였다. 안동 하회마을. 그곳에도 보(洑)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던 탓인지 그는 4대강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섬주섬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마을 건너 낭떠러지 바위인 부용대는 삿대로 저어가는 나룻배 길이 제 길이라고.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게다.
4대강 사업은 하회마을을 비켜갔다. 하회마을의 풍광이 다칠까 걱정하던 사람들과 꼭 같은 호흡은 아니지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가 만들어지면 나룻배가 없어지고 그 대신 모터를 단 유람선이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삿대를 잡을 일이 없어진다. 살림에 보탬이 되는 뱃사공이라는 '생계형 부업'을 놓칠까 걱정이 컸다.
그가 나룻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마을의 정월 대보름 동회는 그의 형님에게 뱃사공의 소임을 맡기기로 결정한다. 당시 뱃사공은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하는 일자리가 아니었다. 타성바지의 몫이긴 했지만 류(柳)씨 집안의 의중과 맞아떨어져야 했다. 이를테면 사전 검증을 거쳤다.
하지만 그의 형님은 뱃사공의 소임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한다. 중학교에 다니며 형님을 거들던 그가 대신 삿대를 잡는다. 학교는 다음해도 다닐 수 있지만 삿대를 놓으면 당장 식구 입에 풀칠하기 힘들다는 어머니의 말을 따른 것이다. 그때는 주로 여름농사가 끝나면 보리로, 가을걷이가 끝나면 햅쌀로 뱃삯을 받았다. 이를 '출입'이라 불렀다. 출입을 얻기 위해 학교를 포기한 셈이다.
그 시절 하회마을은 교통이 불편해 오지나 다름없었다. 나룻배는 외지로 나가려는 주민들에게 긴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또 아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통학버스 노릇을 했다. 1980년대 후반 길이 나고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붐비던 나루터는 하나 둘 사라진다. 나룻배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옛 정취를 맛보려는 이들을 위해 다시 태어났다.
그의 삿대 인연은 쉰이 넘어 다시 이어졌다. 그는 이제 부용대를 보려는 구경꾼들이 타는 나룻배의 뱃사공이 되었다. 노를 저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숲 속에 숨겨놨던 삿대를 찾아 손님맞이에 나섰고 평상시에도 연락이 오면 일하다가 달려나갔다.
손님은 들쑥날쑥하지만 그런대로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삿대로 가는 나룻배 대신 모터 배로 수익금을 늘려야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돈이 판단을 흐린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터로 달리는 동력선이 등장했다. 노 젓는 뱃사공이 필요 없게 됐다. 200여m의 짧은 거리를 모터 달린 배로 순식간에 오간다. 작년 봄에 있었던 이야기다.
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돈 버는 일을 무턱대고 탓할 수는 없지만 하회마을이 돈 벌 목적으로 만든 유원지와 같을 수는 없다. 유심히 살피지 않은 행정기관의 무성의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회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한국의 역사마을로 인정받아서다. 마을과 그 주변에 변화가 있을 때는 세계유산위원회에 알려야 한다. 나아가 유산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문화유산 지정을 취소할 수 있다. 그만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회마을은 조선시대 양반의 주거문화를 오롯이 보여주는 마을이다. 그렇다고 그 양반문화를 있게 한 것은 그들만의 몫이었을까. 선유줄불놀이나 풋굿에서 보듯 양반문화 저편엔 상민문화가 자리했다. 풍류와 정취는 상민의 땀이 배어 양반의 멋으로 탄생했다. 이렇듯 문화유산은 어느 한 쪽만이 다는 아니다. 경제적 잣대로만 따질 일은 더욱 아니다. 다행히 모터 배를 삿대의 그 나룻배로 되돌린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의 삿대 인연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대로 놔둬야 하회마을 아이니껴. 아니면 탈선이지."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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