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제주여행을 준비하다가 인터넷에서 이생진의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이란 시를 만났다. 우도는 몇 번 다녀 온 곳이어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시 한 편이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고 윙크를 해대니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맘속으로 우도행을 결정하고 나니 섬에서 만나야 할 사람과 보아야 할 풍경과 그리고 먹어야 할 음식이 줄줄이 떠오른다. 아둔한 내 머릿속에서 이런 결정적 순간에 천재들이나 지니고 있을 창의력과 기획력이 쉼 없이 튀어 나오니 참으로 기특하다. '그래 가자. 우도엘 가자'며 계획에 없던 것을 실행에 옮기려니 스케줄까지 쉽게 짜진다.
우도에 가면 한나절만 놀다 가기로 했다가 그대로 눌러 앉아 뜬눈으로 살고 있는 여성을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섬 총각과 첫눈에 연애를 하다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누가 누가 이기나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녀의 이름은 안정희. 90학번으로 부산대 미대에서 그림을 전공했고 부산과 제주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이자 시인이다. 정치에 발 들여 놓은 안철수 씨의 사촌 동생이다. 그녀를 수식하거나 형용할 이런 잡다한 설명은 전혀 필요치 않다. 그녀는 다만 풍류객으로, 웬만큼 가락을 잡을 줄 아는 남정네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풍류의 바다를 혼자 유영하고 있다.
그녀는 대학 때 단 한 번 와봤던 우도를 졸업 후 혼자 찾아왔다. 등대 부근을 지날 때 마을 청년들과 술을 마시던 섬 총각과 눈이 마주쳤다. 술자리에 끼어들었다가 별빛 쏟아지는 해변을 파도소리 들으며 함께 걸었다. 운명이었다. 이튿날 그녀는 섬을 떠났으며 섬 총각은 다 잡은 파랑새를 놓쳐 버렸다.
일주일 후, 별밤의 추억을 잊지 못한 그녀가 보따리를 싸들고 돌아왔다. 섬 총각은 마술 지팡이 끝에 날개를 접은 파랑새를 새장 안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바로 결혼했다. 세 살 아래인 남편 편성운 씨와 함께 처음에는 시어머니를 도와 마늘과 땅콩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속에서 일고 있는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다시 팔레트와 붓을 잡고 우도의 파란 바다와 조개와 게 그리고 고동을 그리기 시작했다.
농사 하나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우도 등대 앞에 포장마차를 열고 막걸리, 파전, 어묵 판을 벌여놓고 그 옆에 우도의 반짝이는 바다를 직접 그린 그림엽서를 팔았다. 그러다가 수채화 32점과 그림을 뒷받침하는 시 32편으로 '우도를 그리는 꽃잎 바다'란 시화집을 냈다.
그러다가 고물 버스 한 대를 구해 그녀의 작은 갤러리를 열었다. '초록 우도'란 멋진 갤러리는 화가의 산실이자 그녀가 끓여 낸 열무국수와 해물파전을 맛 볼 수 있는 간이 식당이다. 버스 안으로 올라서면 풍경은 다소 생경스럽다.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달리고 싶어 하는 버스의 차창은 온통 우도 풍경으로 도배되어 있다.
푸른 바탕에 뭉게구름에 가려진 초승달 위에 소년이 앉아 있는 샤갈 풍의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그녀가 내려 준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노래 한 곡을 듣고 싶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트럼펫 솔로로.
이번 여행에 우도의 화가를 기억해 낸 건 우연에 가깝다. 몇 달 전인가. 아침 텔레비전 방송에 낯익은 바다 풍경이 보이길래 자세히 보니 우도였다. '인간극장'이란 프로그램에서 섬 총각에게 발목이 잡혀 평생을 저당 잡힌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하고 있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가 거의 날것으로 방영되자 찾아오는 육지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제주 민속품의 주종이 돌하르방뿐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가 그린 그림엽서는 최고의 인기상품이다.
나는 제주 여행 마지막 날 우도로 들어갔다. '초록 우도'가 쉽게 눈에 띄겠거니 하고 걸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하호호'라는 땅콩버거집 아가씨에게 "그림 그리는 여류화가의 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다. "그분요, 이제 우도에 살지 않고 제주시로 이사를 갔어요" 한다.
잠시 망연자실해졌다. 그녀를 찾아온 도시의 처녀들이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이면 "내가 부러우면 너도 그렇게 해버려"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배포 큰 풍류객이 우도를 떠나버리다니. 아이고 안타깝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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