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 이순신을 그리다니, 따분하지 않을까. 혹은 고뇌하는 이순신을 보여주겠다고 그의 숨겨진 이면을 드러낸다면, 민족 영웅을 폄훼한다고 욕먹을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이순신의 영화화는 힘들다. 이미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인물을 의무감에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을 터. 그래서 이순신을 소재로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150억원 예산이라는 중압감은 또 어떤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명언에 걸맞게 망작의 향기가 피어오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긴장감 속에 '명량'이 공개되었다. 전작 '최종병기 활'로 스피디한 액션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 영역을 보여준 김한민 감독은 '명량'에서 이순신을 둘러싼 장황한 이야기들을 버리고, 명량대첩의 현장, 그 한곳을 집중 공략한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적중한 듯하다.
성수기 극장가 블록버스터의 향연이 시작되는 첫 주인 지난 주말, '군도: 민란의 시대'는 신기록 행진 중이다. 최단기간 최다관객 동원이라는 찬란한 기록으로 흥행 돌풍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번 주에는 강자가 바뀔 것이라는 예측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중후한 '명량'이 주는 힘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명량대첩은 선조 30년인 1597년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무찌른 전투다. 이 전투는 누명을 벗고 파면당한 이순신 장군이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지형적 환경과 치밀한 전술을 이용해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조선의 해상권을 회복하게 된 사건이다. 영화 '명량'은 명량대첩을 최초로 영화화했다.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서 논리 구조를 탄탄하게 하여 설득력을 높이며, 전쟁 액션 스펙터클을 더해 오락적 요소를 끌어올렸다.
영화는 명량대첩 8시간의 숨 막히는 전투를 61분간 지속되는 스펙터클 시퀀스에 담아낸다. 치밀하게 계산된 액션 동선, 그리고 조선 장군과 왜군 적장의 팽팽한 대결은 결과를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긴장감을 던져준다. 전쟁 리얼리티는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철저한 조사 및 지형, 날씨, 병력학, 당대 의상 및 생활 습관에 대한 고증 등 수많은 세부 조사들을 바탕으로 한다. 상영시간 2시간 중 2분의 1이 해상 전투에 총력을 가하는데, 스펙터클로 팡팡 터지는 이 시간은 흥미 위주로 짜여지거나, 혹은 볼거리만 있어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승리의 드라마가 있고, 불가능한 현재를 뛰어넘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어내는 연대의 고귀한 정신이 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바다는 쳐다보기도 싫은 때, 게다가 세월호를 집어삼킨 회오리 바다가 배경인 '명량'은 때를 잘못 만난 저주받은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힘 있는 자들이 배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현실에서, 바다를 지키고 배를 지키고, 그리고 백성을 지켰던 이순신 장군의 충정은 가슴에 무겁게 다가온다.
강한 남자의 영화다. 이순신과 구루지마의 대결, 최민식과 류승룡의 대결이 불꽃 튀고, 조진웅, 김명곤, 진구 등 조연들의 열연도 볼거리다. 이에 못지않게 바다의 다이내믹한 흐름, 배를 일자로 배치하는 일지진, 배 위에서 칼과 총으로 맞붙는 군사들의 전투인 백병전, 배와 배를 부딪치는 충파 등의 해전 전술과 화약 총통, 포와 조총 등 무기도 또 하나의 조연 역할을 수행한다.
진지하고 장엄하며 비장하다. 유머나 해학이 낄 자리는 없다. 퓨전 사극들이 역사를 쉬이 곡해하는 환경에서 '명량'의 정통 전쟁 사극식 정공법은 성공 한 듯하다.
정민아(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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