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니가 좋으면-김해자(1961~ )

시방도 가끔 찾아와 나를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 나가는 말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 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이 세상 것이 아닌 말

덜 자란 토끼풀 붉게 물들이던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게 다인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말이 있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2. 후반기

누구에게나 가슴 깊이 남아 있는 말 한마디쯤 있다.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말, 그래서 혼자 가만히 입속으로 염불처럼 외우는 말이 있다. 단순한 말, 무심코 하는 말 같지만 그 말은 그의 인생의 나침반을 돌려놓기도 하고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해자 시인의 그 한마디는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하던 친구의 말이었을 것이다. 화자를 무던히 좋아해서 화자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조건 긍정하던 순수한 소년의 말이었을 것이다. 화자는 그 말을 '가장 깨끗한 말'이라 했다. 1970년대에 '러브스토리'라는 영화 대사 가운데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들의 불행이 누구 때문이라고 따지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런 이해타산도 계산도 끼어들 틈이 없는 완전한 사랑이란 이렇게 따지지 않는 것이리라. 당신의 한마디는 무엇인가.

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