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간월암 독살

풍류객들의 본령에는 시주색(詩酒色)이 바탕 되어 있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풍류기가 발동하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기생들과 얼려 가무를 즐긴다. 그 장소로 풍월수(風月水)가 받쳐주어야 한다. 바람 부는 언덕, 달빛 휘영청한 정자, 물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계곡이면 풍류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취미활동을 들춰보면 천렵과 수렵 등 엽(獵)자와 상당히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다산도 낙향하여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배 하나를 사서 그물과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춰놓고, 또 술과 잔 그리고 소반을 준비하고 싶다. 늙은 아내와 어린 아이 그리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데리고 수종산과 소수(水) 사이를 왕래하면서 오늘은 그물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어느 곳에서 낚시질을 하며 그 다음날은 여울에서 고기를 잡을 것이다. 바람을 맞으면 물 위에서 자고 때로는 짤막한 시가를 지어 스스로 팔자가 사나워 불우하게 된 정회를 읊을까 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다산의 시 '소내강 안개 속에서 낚시질하며' 중에서)

선비들의 기록을 보면 낚시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천렵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들 중의 일부는 벼슬자리에서 내려와 고향에 머물면서 덫과 창으로 수렵까지 즐겼다. 잡은 짐승들은 손수 요리하여 술을 마시며 노닐었던 기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렇듯 천렵과 수렵은 사람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아주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천렵과 수렵처럼 엽(獵)자가 뒤에 붙으면 자연 속에서 즐기는 행위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엽관(獵官'벼슬자리를 얻으려 추한 행동을 함), 엽주(獵酒'지인을 찾아다니며 술을 얻어 마심), 엽색(獵色'색을 탐함) 등 앞에 붙으면 야비한 인간들이 무엇을 탐하는 나쁜 단어로 바뀌게 된다.

제주의 어느 갯마을을 걷다가 바닷가에 돌을 쌓은 독살을 보고 한참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찾은 듯하여 깜짝 놀랐다. 갑자기 고기가 잡고 싶어졌다. 독살은 쉽게 표현하면 돌로 만든 그물이란 뜻이다. 해변에 돌 성을 쌓아 밀물 때 물결 따라 들어왔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를 뜰망으로 잡는 원시적인 방법을 말한다.

내 고향은 바다가 먼 농촌이긴 하지만 봇도랑을 막아 세숫대야로 물을 퍼내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곤 했다. 또 강의 얕은 모랫바닥에 둑을 쌓아 그 속에 들어온 피라미 떼를 버드나무 회초리로 두들겨 잡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바닷가 독살을 보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동안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바닷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은 독살과 뻘에 말뚝을 박아 그물 말을 친 곳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럴 때마다 바지 둥둥 걷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태안반도 노루미 해변의 별주부 마을과 서산 삼길포의 독살 그리고 꾸지나무 골의 아름다운 해변들이 눈앞에 아롱거려 환장할 지경이다.

그중에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 곳이 있다. 서산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간월도 간월암이 바로 그곳이다. 섬이 절이자 절이 곧 섬인 곳이 바로 간월도다. 간월도 동남쪽엔 규모가 제법인 독살이 밀물 때만 되면 온갖 고기를 끌어들인다. 스님들이 고기를 잡아 몰래 젓국을 담글 리가 없을 텐데 암자 옆에 독살 어장이 붙어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국내 버킷 리스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간월암 스님에게 방부를 드리자. 하룻밤 외딴방에 묵게 되면 늦게까지 해조음을 듣자. 새벽에 물이 빠지면 독살에 나가 고기를 건지자. 스님 모르게."

간월도는 밀물 땐 섬이 되고 썰물 땐 육지와 연결되는 특이한 지형이다. 이는 프랑스의 종교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쓴 소설 '이중 설계'의 배경이 되는 몽샐미셸 수도원과 거의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곳 간월도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유명하다.

간월암은 신비로우면서 아름답다. 일출과 일몰 풍경은 막힌 곳이 없어 더욱 기가 막히고 달빛과 별빛은 유난할 정도로 은은하고 맑다. 그래서 간월(看月)이라 했다. 연전에 고교 동창 몇몇이 모여 은하가 흐르는 바닷가 하늘 밑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즐긴 적이 있다.

그런 어느 멋진 날이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버킷 리스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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