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자 참여마당] 수필-어떤 만남

이제는 곧잘 평일에도 가고 싶은 고향을 다녀온다. 그날은 분명히 평일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나의 창작실에 출근하여 카페 일곱 군데와 블로그 한 군데 등에 글을 올려 두고 불현듯 여름 산, 고향의 토함산(吐含山)을 만나고픈 욕심이 동해서 등산복을 챙겨 입었다. 생수통 하나, 검은 비닐 주머니 두 개를 등산 가방에 넣으면 누구든 만남이 시작되었다.

동부정류장 직행 표를 끊어 자리에 앉으니 시동을 걸지 않아 칠월 염천에 숨이 막힌다. 이상도 하다. 차에 사람들이 오르지 않는다. 평일이라서 시외로 나가지 않는 모양이다. 기사가 오르고 시동이 걸리면서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혼자 앉아 있는데 기사가 와서 경주를 가느냐고 확인한 후 바로 출발하였다.

경주터미널에 내려 다시 모화(毛火) 가는 600번 시내버스에 올랐다. 오는 날이 경주 장날이라 승객들이 오르기 시작한다. 시골 사람들의 구수한 인사말들이 오가면서 제법 시끌벅적해졌다. 언제 찾아도 반가운 고향, 천년 경주의 첨성대와 동궁(東宮) 월지(月池)를 지나는데 희고 붉은 연꽃이 나를 반겨 주었다. 뜨거운 여름인데도 전국에서 관광지로 몰려 온 하객(夏客)들로 붐빈다. 저만치 명활산성이 다가오면서 문창후독서당과 능지 탑이 보이고, 어느덧 박제상의 아들 백결 선생이 살았던 낭산(狼山)에 닿으면서 선덕여왕 능과 사천왕사지, 신문왕릉을 지난다. 그리고 깜빡 졸았던 것이다.

어느새 도착지 시래교(時來橋)에 왔다. 언제 보아도 기분 좋은 삼각형처럼 생긴 토함산이 나를 반겨 주는 고향 이곳 정류장에 내렸다. 동해남부선 시래 철교 밑을 지나 철길을 남으로 따라 선산이 있는 곳을 부지런히 걸어 오르는데 제법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오면서 여름을 톡톡히 경험한다. 아버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편안하신지 나란히 누워서 내가 찾아오는 것을 반겨 주신다.

이제 앞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넷째 형인 계형(季兄)이 넷째 누님·매형과 함께 선산 곁에 설치한 간이 휴게소에서 소일거리로 고스톱을 즐기고 계셨다. 마치 약속이나 하듯이 만나 커피도 음미하였다. 시롱∼거리며 우는 매미들은 노년들이 즐기는 놀이에 시샘이라도 하듯 쉼도 없이 울어댄다. 산골 멀리 뻐꾸기가 "기집 자식 다 죽고서∼"라는 비슷한 음으로 울어댄다.

오랜만에 만난 형님과 누님·매형 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간이 휴게소 골짜기에서 불어 내어주는 냉기를 시원한 맥주 마시듯 그곳의 매력에 빠져 신선이 되었다. 계형이 가꾸어 둔 채소를 얻었다. 입맛 돌아오는 머위와 줄기가 꼿꼿이 자라 오르는 상추 잎을 가려,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리고 역방향(逆方向) 대구로 올라오고 있었다.

경주터미널에서는 이미 포항에서부터 타고 온 손님들이 있었고, 나도 좋은 자리를 잡아 가방을 던져두고 앉았다. 저녁 7시 30분, 대구를 향해 출발하려고 기사가 표를 모은다. 그때였다. 내가 앉은 뒤편 오른쪽 자리에 희멀건 다리를 감히 내어 놓고 자리를 잡은 아가씨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 미니를 입은 아가씨였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실내등이 꺼지고 조명만 들어와서 어렴풋이 아가씨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6학년 6반에 이른 아저씨가 아가씨를 눈여겨볼 필요도 없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고속으로 내달렸다.

"용계동 내리실 분은 내리세요!"

차가 정지하고 두 사람이 내렸다. 그리고 직행버스는 시내를 향해 질주하였다. 유리창에 보이는 것은 벌써 어두워지면서 차폭등만이 난무하였다.

"동대구역 가실 분 내리세요!"

차가 정지하기도 전에 자동앞문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그래도 아무도 내리지 아니하고 다시 출발하였다.

"동부정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나는 등산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그 아가씨가 내 곁에 다가오면서 물었다.

"도시철도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도시철도? 어디 가려고 해요?"

"두류에 가려고…."

"그러면 아까 동대구역 쪽에 내리라고 했을 때 내렸어야지."

"전, 서쪽에서만 살아서 여기 잘 몰라요."

이것 참, 갑자기 자기가 가려는 곳을 계획적으로 가야 하는데 무계획적으로 동부정류장에 내려서 도시철도 탈 곳을 찾다니 이런 일을 어쩌나. 아는 길도 갑자기 물으니까 나까지 순간에 바보가 되고 말았다.

나는 MBC 앞으로 가는데 걸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걸어도 좋으면 도시철도가 있는 범어네거리(범어역)를 안내해 주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두류역으로 가려면 도시철도 2호선을 타고 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그때부터 미녀(?) 아가씨와 동행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도 있겠지만 번호 익히기가 쉽지도 아니하여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도회지 가로(街路)에서 얼굴 예쁜 아가씨와 가끔 힐끗 얼굴을 쳐다보면서 범어네거리를 향해 걸었다. 조금은 미안해서 걸어서 다리가 아프냐고 묻기도 하였고, 어디 사느냐고 물은즉 본리동에 산다고 하였고, 내가 묻는 말에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넙죽넙죽 답변도 잘 해 주었다.

MBC네거리에서 삼성화재 쪽으로 길을 건너서 스트레이트로 걸어가면 MBC네거리처럼 범어네거리가 나올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늘그막에 수필가로 등단하여 오늘 일이 글로 나오게 될 것 같다고도 하였다. 석정장어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나는 우회전, 아가씨는 직진하여 나아갔다. 약 20분간 미녀 아가씨와 동행하여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이런 만남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짧은 만남이지만 상큼 발랄한 아가씨 얼굴이 떠올랐다. 약속 장소인 도시철도 두류역까지 잘 도착하였는지 은근히 걱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영백(대구 수성구 상록로)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