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일의 생각] 어정칠월 건들팔월

여름 같던 봄이 순식간에 지나고 바람이 건듯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장마도 거의 끝나버리고 본격적인 땡볕의 계절이 왔다. 하루하루는 그리 빠른 줄을 모르겠는데 지나고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 버렸는지, 마치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올해는 특히 이런저런 일, 사건사고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우왕좌왕하다 보니 1년의 반 이상이 날아가듯 지나고 말았다. 세월호가 우리를 망연하게 했고, 지방선거에다 월드컵은 일에서 손이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7월도 막바지인데, 이렇게 8월 휴가철까지 보내고 또 곧 있을 아시안게임으로 들떠 TV 앞에만 붙박여 있다가 그렁저렁 또 한 해가 훌쩍 지나가버리는 게 아닐지.

농사가 주업이던 시절 우리네 일상을 일컫는 말이 있었다. 깐깐오월, 미끈유월,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 했다.

봄이 무르익어 모내기다 뭐다 한 해 농사 준비하느라 이것저것 챙기고 준비해야 할 게 많아 바쁜 5월이라 깐깐오월이라 했고, 그렇게 농사일을 시작해 보리 타작하랴 모내기하랴 바쁘게 설치다 보면 미꾸라지 빠지듯 미끄덩 도망가 버리니 미끈유월이란 말이겠다. 곡식과 과일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7월이 되면 날씨도 덥지마는 봄에 비해서는 하는 일이 적어 어정어정하는 사이에 한 달이 가버린다. 추수를 하고 추석이다 뭐다 축제 분위기에서 건들건들 들떠 있다 보내버리는 것이 8월이다.

그러고 보면 1년 열두 달이 전부 이렇게 미끈 어정 건들거리다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한다. 지나온 반년이 그랬듯 남아 있는 몇 달도 건들구월, 설렁시월, 휘릭십일월, 번쩍십이월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하는 일도 없이 해놓은 일도 없이 그렇게 한 해 두 해를 보내버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일상이 아닌지.

한 해를 보내고 시작할 때는 누구나 한 번쯤 앞날을 설계해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 그리 단단하지는 못해 그 무쇠 같을 것만 같던 각오도 조금씩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조금씩 조금씩 시나브로 풀어지기 시작하면 어느새 완전히 풀어져 버린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핑계거리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일이 있었고, 또 저런 일 때문에 시간이 없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올여름 휴가는 일찌감치 다녀왔다. 남들이 다 떠나는 칠말팔초를 피해 장마철에 조용히 쉬니 모처럼의 휴식이 한결 여유로웠다. 휴식이 여유로우니 이런저런 생각들도 제멋대로 왔다갔다한다. 미끈, 어정하며 흘려버린 시간들도 모두 되돌아와 내려앉는다. 돌이켜보니 되는 대로 지내온 시간들이 어느 한순간 깐깐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후회할 일도 적지 않지만 어찌하랴. 남은 몇 달만이라도 깐깐하게 살아봐야겠다며 생각을 다잡아보았다. 2014년의 해는 아직 중천에 떠있지 않은가. 주간매일 독자들께서도 이번 여름휴가는 남은 반년을 다시 추스르는 시간으로 정해보면 어떠실지.

홍헌득 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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