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이다. 대한민국의 '배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배달에는 한국인의 '창의성'이 녹아 있다. 공원 잔디밭 한가운데서 치킨을 주문하고, 야구장에 자장면과 짬뽕, 팥빙수까지 배달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 한국에서는 배달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것을 찾는 편이 더 쉽다. 이제는 동네 마트도 배달 전쟁에 뛰어들었고, 각종 관공서 서류와 기차표, 약, 심지어 사람까지 배달한다.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배달한다'는 생활 심부름 전문 업체도 있다. 배달, 도대체 어디까지 가능할까. 대한민국의 배달 세계를 분석해봤다.
◆한국의 햄버거 배달, 미국인도 놀랐다
"××대학교까지 걸어서 10분 거리, 지하철과 가까움, '맥세권'."
들어는 봤는가, 맥세권. '역세권'도 아니고 맥세권이라니. 자취생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용어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배달되는 지역을 일컫는 신조어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햄버거 배달이 외국인들 눈에는 감탄의 대상이다. 추가로 배달비나 팁을 받지 않고, 365일, 24시간 배달되는 햄버거에는 한국의 배달 문화가 응축돼 있다.
대구에 사는 미국인 텐진 카트상(26) 씨는 배달 예찬론자다. 미국에서 도미노 피자와 피자헛 단골 배달 고객이었던 카트상 씨는 맥도날드가 한국에서 24시간 햄버거 배달을 하는 사실이 지금도 놀라울 뿐이다. "맥도날드가 한국에서 현지화 전략을 잘 쓴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점이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배달을 하잖아요. 한밤중에 잔디밭에서 치킨을 배달 주문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거예요. '치맥' 배달이 왜 이렇게 인기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또 한 번 놀란 것은 한국의 '배달 속도'다. 카트상 씨는 "미국에 있을 때 중국 음식점에 종종 배달 주문을 했지만 음식이 식었거나 신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국의 배달 음식은 미국보다 더 빠르고, 따뜻하고, 신선하다. 한국의 배달이 감동적인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잔디밭 치킨 배달은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다. 특히 잔디밭 치킨 명소인 대구 두류공원 야외음악당은 여름철이 되면 전단을 돌리는 배달맨들로 가득하다. 잔디밭 배달이 가능한 데는 간단한 비밀이 숨어 있다. 두류공원 근처 치킨집 관계자는 "가로등마다 고유 번호가 있다. 잔디밭 치킨 배달이 들어오면 근처에 있는 가로등 번호를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출발한다. 여름철 야외음악당에는 잔디밭에 상주하면서 배달 주문을 받는 치킨집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객 대신 장 봐서 문 앞까지 배달
배달에는 '성역'이 없다. 요즘 동네 슈퍼마켓들은 고객 대신 장을 보고, 물건을 포장해 현관문 앞까지 배달하는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대구 수성구의 한 슈퍼마켓.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슈퍼마켓 앞에는 '1만원 이상 구매하면 문전 배달 서비스 제공'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 슈퍼마켓에는 전담 '배달맨'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곳 배달맨인 장경식 씨의 배달에 기자가 동행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거창한 배달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해였다. 장 씨에게 필요한 것은 배달용 바구니와 바퀴가 달린 카트다. "거의 다 걸어서 가요. 차는 먼 곳에 갈 때 쓰고요."
이날은 근처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장 씨는 "팥빙수 재료"라며 시리얼과 연유 등이 든 바구니를 끌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주문한 지 30분도 안 돼 물건이 도착하자 유치원 교사는 "진짜 빨리 도착했네요"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주문은 생수 두 박스. 가격은 1만2천원이다. 장 씨는 "생수는 무거우니까 배달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며 카드결제기까지 챙겨 나섰다.
배달 서비스는 수익이 나는 사업이 아니다. 이 슈퍼마켓에 들어오는 배달 주문은 하루 평균 50여 건으로 전체 판매량의 5% 정도다. 하지만 대기업 SSM이 배달 서비스를 먼저 시작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아파트 밀집 지역에 있는 슈퍼마켓을 중심으로 이 같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마켓 프라임' 전영제 주임은 "배달은 '중독'이다. 한번 배달 서비스를 맛본 이들은 거의 단골이 된다. 수박, 생수처럼 간단한 물건만 배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금치 몇g, 당근 한 개, 상추 1천원어치'처럼 잡채 재료 20~30개 품목을 전화로 다 주문하는 고객들도 많다"고 말했다.
주부들은 이 같은 슈퍼마켓 배달을 환영하고 있다. 두 살 된 아들을 둔 김민정 (30'대구 수성구 신매동) 씨는 "요즘같이 더운 날에는 아이와 함께 슈퍼마켓에 가는 것도 큰 일이다. 채소나 과일은 직접 보고 사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혼자 있을 때 수박이나 생수 등 무거운 물건은 전화로 주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귀차니즘' 파고든 생활 심부름
최근에는 담배와 기차표 배달, 설거지까지 대신 해주는 '생활 심부름' 업체도 배달 시장에 뛰어들었다. 바쁜 도시인들의 생활 패턴과 '귀차니즘'이 결합해 생활 심부름 시장도 점차 성장하는 추세다. 미스터심부름 대표인 신기준 (40) 씨는 안 해본 배달이 없다. 가장 자주 하는 배달은 맛집 음식 배달이다. 덕분에 대구의 소문난 맛집 알짜 정보를 덤으로 모았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들은 배달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아요. 생고기나 회, 만두, 콩국수 등을 맛집에서 포장해 고객이 있는 곳으로 배달해요. 대구의 맛집 만두를 포장해 KTX 특송으로 서울에 부친 적도 있어요. 보통 음식값을 제외하고 기본요금 1만원을 받고 대기 시간과 거리에 따라서 요금이 달라집니다."
재미있는 배달도 많다. 제품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 성인용품점에서 물건을 사달라는 사람도 있고, 현금을 주면서 "은행에 돈을 입금해 달라"고 부탁하는 믿음 좋은 고객도 있다. 변비약과 피임약을 배달시키거나, "밤길이 무섭다"며 집까지 배웅해 달라고 하는 여성 고객, 두 시간 동안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술을 마셔달라는 외로운 영혼들의 주문도 들어온다.
사람 배달도 한다. 수능시험 당일, 학생을 오토바이 뒤에 태워 시험장으로 데려다 준 적도 있다. 전통시장 장보기 배달도 자주 한다는 신 씨는 "대구에 있는 웬만한 시장은 다 가봤다.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특정 떡을 지목하면서 구해달라고 했었는데 그때 대구 시장을 다 돌아본 것 같다"며 껄껄 웃었다.
가장 충격적인 배달이 뭔지 묻자 신 씨는 "설거지 배달 심부름"이라고 털어놨다. 혼자 사는 여성들을 위해 벌레 잡기, 화장실 변기 뚫기, 커튼 설치 등 잡다한 집안일 심부름을 하는데, 설거지 심부름이 특히 많이 들어온다고 신 씨는 설명했다. "여대생들이 설거지 심부름을 많이 요청해요. 설거지를 일주일치 미뤄서 산처럼 쌓아놓는데 어휴, 직접 보면 엄두가 안 나요. 얼마 전에 갔던 곳은 음식물은 싱크대에서 썩고 있고, 쓰레기봉투에서는 벌레가 나오고. 설거지는 기본 3만원이에요. 엄마가 집에 오기 전에 정기적으로 전화하는 대학생 고객들도 있어요. 여대생들한테 실망했습니다. 하하."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배달은 야간 약 배달이다. 대구에 있는 심야약국을 죄다 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약 배달을 하다가 마음이 아렸던 적도 있었다. 신 씨는 "야간 약 배달은 기본요금이 1만원인데 어떤 여자분이 전화를 걸어 '아기 몸살약이 필요한데 배달료를 3천원만 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하더라"며 "그 집을 방문하니 사정이 딱해 보여서 3천원만 받고 왔다"고 안타까워했다.
'배달맨' 신 씨는 우리나라의 배달 문화에는 고유의 민족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성격이 급하다 보니 무조건 빠른 것을 좋아하잖아요. 어떤 분들은 20분 안에 안 오면 '왜 안 오느냐'고 자꾸 전화를 걸어 채근해요. 그래도 저는 배달이 재밌어요. 매일 다양한 고객을 만나고, 예측 불가의 새로운 배달을 시도하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 아닐까요."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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